매거진 글의궤도

대화의 맛

글의궤도 1호

by 유영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상대가 반짝반짝 빛나는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상대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묘하게 더해져가는 그의 활기에 나도 모르게 입고리가 위로 씰룩씰룩 올라간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분명 둘 사이엔 알콜이 없는데도, 소주잔이 빠르게 비워져가는 느낌이랄까. 좋아하는 수준이 어떤지에 따라 상대의 반응도 좀 다른데, 대화하면서 이 부분을 캐치하는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미끼를 문 상태, 약간 혹하는 상태에서는 그는 보통 대화 주제로 안 올린다.


관심이 본격적으로 생겨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을때부터 대화에 슬며시 관심사를 꺼내놓는데, 이 단계에서는 신장개업 행사매장 앞의 흐느적거리는 풍선인간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감정이 드러난다. 특히 뜻밖의 분야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감정이 분단위로 널을 뛰는게 보이는데, 이 순간을 눈으로만 담기가 아까울 때도 있다. 관심이 최고조인 경우에는, 대화 초반부터 주제로 올리면서 두눈에서 형형한 빛을 쏘며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인다.


이때가 사실 제일 재밌다. 여기서는 상대가 99%의 확률로 이성이 흐려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재밌는 말들이 나온다. 한 사람이 흥분, 쑥스러움, 자기 자신에 대한 질색 등의 감정을 표현할 때 동원되는 얼굴 근육은 경이로울 지경으로 정신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대화를 하다가 빠르게 지치는 편인데도, 이런 관심사 얘기가 나오면 급격히 바빠지는 상대의 주름과 얼굴 구석구석을 보면서 정신이 차려진다.


최근에 화상회의로 만난 친한 언니는, 20년 초부터 알게 된 어떤 남성분 얘기를 꺼내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올라간 광대 때문에 작아진 두 눈을 손으로 가려댔다. 덕분에 같이 얘기하고 있던 3명을 단전부터 끌어올린 웃음소리를 내게 만들었고, 그 이후에도 거의 1년동안 그분께 쏟아부은 노력을 얘기하면서 화려한 얼굴 근육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 에너지에 내가 다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이런 대화의 맛을 알게 된건 의외로 사회생활 하면서부터였다. 돌이켜보면 뭐에 빠져있고 이런 얘기를 제일 많이 한건 중,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는 그런 대화가 일상적이어서 재미를 몰랐던것 같다.


대학생 때는 개인적인 일로 힘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즐거운 얘기를 해도 그닥 감화되지 않았고, 졸업 후 사회생활 하면서는 사실 지인들과의 대화도 결이 달라져 유쾌한 얘기를 많이 하지 않게 되었다. 힘들다는 얘기가 주가 되어서 대화를 하면 오히려 기분이 착 가라앉는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덕분에 가끔 나누게 되는 에너제틱한 대화에서 오는 맛을 깨닫게 된것 같다. 다같이 잔잔한 우울함에 빠져 얘기하다가 알콜냄새 풍기는 대화를 할 때의 짜릿한 맛이란! 이런 대화를 나눌 땐 바람에 불어 날아가는 가랑잎만 보고도 킬킬 웃음이 터져나온다.


다만 시국이 이렇다보니 이런 재미를 자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게 안타깝다.


화상회의를 쓰지 않는 한 거의 만나지도 못할 뿐더러, 모두의 일상도 변하고 있어 새로운 분야를 좋아하는 것도 전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어쩌다보니 코로나 종결을 바라는 글로 마무리 짓게 될것 같은데, 다시 활기 넘치고 에너지가 끓어넘치는 대화를 마주 앉아 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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