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궤도 1호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누군가는 로펌을 궁궐이라고 했다. 으리으리한 외관과 품격있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우월한 공간.
그 안에는 왕위를 노리는 자, 감언이설로 아부는 자, 철새처럼 주기적으로 태도를 바꾸는 자, 역모를 꿈꾸는 자, 궁궐을 탈출하고자 하는 자, 소리 소문없이 없어지는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자. 그런 자들이 모여있다.
내 두 발로 들어왔지만 두 발로 다시 나가기 힘든 이 곳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오늘도 벌어진다.
[노펌판타지]
어느 백수
법대생은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판검사 그리고 변호사.
나도 고등학교 때는 잠깐 꿈꿨다. 유전무죄를 타파하노라. 정의를 실현하노라.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진단을 내렸다. 그 길은 너의 길이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엉덩이가 들썩들썩한 걸 보니 정확한 진단이었다.
대학교 땐 일주일에 서너 번은 노래방에 가서 에픽하이 노래를 열창했다.
“아-무도 내 맘-을 모르죠~~ I can’t stop love love love” (love love love은 스타카토로 불러줘야 맛이 산다.)
1시간을 결제했지만 2시간이 서비스인 단골 노래방에서 흥을 다 날려버리면 친구에게 쉰 목소리로 "와플 먹으러 가자."라고 말했다. 천오백 원짜리 아이스크림 와플을 손에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2년을 지냈다. 나머지 1년은 계절학기와 재수강을 하며 무너진 학점을 보수했고, 마지막 1년은 운 좋게 인턴이 합격되어 일주일에 한두 번만 학교에 나왔다.
얼떨결에 시작한 사회생활은 좋은 동료와 상사를 만나 매우 순탄했다. 아직 대학생인 친구들과 얘기할 때도 컨펌, 포워딩, 팔로업 등의 단어를 쓰며 일부러 직장인 티를 냈다. 그 무렵 언니가 공무원에 합격했다.
법원에 출퇴근하는 언니를 보니, 고등학교 때의 나의 꿈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리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직장 동료들은 "공무원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답답해할 것이다.", "그래도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었다.
정확한 진단이었다. 2년 공부 끝에 나는 답답함을 못 이기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자존감이 무너질 만도 한데, 나는 마이웨이를 깨달았다. 사람은 저마다에 길이 있으니 너무 인생 지루하게 무겁게 살지 말자는 개쿨함도 함께 얻었다. 벚꽃이 눈꽃처럼 핀 4월, 달콤한 백수의 길로 들어섰다.
허리가 아플 때쯤 잠에서 깨서 밀린 티브이를 보고, 소파에 반쯤 누워서 이제 때려치웠다고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실내 생활만 한 흙빛 수험생 얼굴에서 벗어나기 위해 햇빛도 많이 쬐었다. 외형은 인간이 되고 있었다.
7월 오후 2시경 낮잠을 자려고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이 생활이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3초 후 불안감이 휘몰아쳤다. 백수인 것보다 백수가 좋아 죽겠다는 내가 무서웠다. '이것아, 네가 말한 너의 길이 이거냐. 인생 참 가볍게도 잘 산다.' 자기 비하에 가까운 자책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로 핸드폰에 구직 어플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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