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궤도 2호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한낮의 구민체육센터는 저녁보다 한적하다. 하지만 간혹 저녁보다 훨씬 시끄럽다. 왁자지껄한 소리의 주인들은 바로 아이들이다. 얼핏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이들은 센터 1층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 강습을 받으러 온다. 이들은 센터 일상 중 절반을 책임지는 주인공들이다.
코로나로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이 한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다 쏟아내는지 별의별 이야기와 운동장에서나 낼 법한 소리를 왕왕 쏟아낸다. 탈의실과 샤워실에 들어서면 나는 그들의 이야기와 소리를 반강제적으로 들어야 한다. 엿들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엿볼 수 있고 내적 웃음을 지을 일도 많다.
"너는 요새 무슨 만화 봐?"
"... 나는 케로로."
"너 아직도 그런 거나 보냐? 요즘엔 그런 거 보면 안 돼"
"…"
"매국노."
8살 남짓한 아이는 순식간에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일본 불매운동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도 통하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케로로를 보는 아이도 잠깐 망설인 다음에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이 자신도 일본 불매 운동을 벌이는 분위기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도 어찌어찌 대화가 이어지는 걸 보니 대화의 상대가 매국노라는 건 그들 사이에서 별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말이야 점심 먹으려면 줄을 서야 해. 그리고 줄을 서다가 차례가 되면 식판을 들고 있어야 해."
"왜 식판을 들고 있어?"
"음… 학교에서는 식판을 들고 밥을 먹거든. 거기에 아줌마들이 밥이랑 국이랑 담아줘."
"그렇구나. 근데 식판이 거기에 있어?"
"응. 줄 서는 데 보면 엄청 많아."
초등학교를 먼저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인생 선배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는 후배에게 줄 서서 점심 먹는 문화를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후배 아이는 초등학교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나 보다. 괜스레 나도 중학교에 다니면서 급식을 먹던 때가 떠올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아이들도 많다. 샤워실에 들어가려는 데 안에서 공룡이 서로 싸우는지 으르렁 소리가 들린다. 실제로 공룡 소리를 들은 적이 없지만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룡을 몸속에 품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쓰던 락커 옆 바닥에 주저앉아 옷을 갈아입던 아이는 ‘아르르르’ 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머리를 티셔츠에서 꺼냈다. 나는 속으로 '그런 소리를 내면 옷을 더 잘 입을 수 있는 건가?' 하면서 피식 웃었다.
한 아이는 무엇인가의 크기나 대단함이 엄청 크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는지 오만가지 숫자와 단어들로 계산을 했다.
"그거는 진짜 백 곱하기 백 곱하기 지구 곱하기 지구 곱하기 우리 엄마 곱하기 우주 곱하기… 700쯤 되는 것 같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건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마지막에 소심하게 700이라고 대답하는 걸 보면 그 아이가 알고 있는 숫자 중에서 가장 큰 숫자가 700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에게 곱하기는 마법과 같은 단어인 것 같다. 도대체 지구와 지구를 곱하는 것과 엄마를 곱하다니…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도대체가 계산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본인이 가족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얘기였으면 참 사랑스럽게 들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도대체 무엇의 크기를 얘기하던 것이었을까? 잠시 아이들처럼 아무 소용도 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워보았다. 그들은 이어서 이런 얘기를 했다.
"네가 생각했을 때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야?"
"음… (한참을 고민한 뒤) 사실…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지." - (은근히 대답을 생각하는 것도 귀여운 포인트 중 하나다)
"아 진짜? (매우 수줍어하며) 우리 집도 그런데."
"근데 우리 엄마가 진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울걸? 엄마가 한 번 화나면 진짜 아무도 못 막아. 저승사자가 와도 아마 못 막을 걸?"
"아 그래? 그럼 염라대왕이 와도 못 막을까?"
"음… 그건 잘 모르겠는데 염라대왕도 엄청 세지 않아?"
이제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 아이들은 '강함' 대결을 붙이는 걸 좋아한다. 자기가 생각해내거나 좋아하는 사람 혹은 캐릭터가 가장 강할 때 그제야 안심하는 것 같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염라대왕이 아마 가장 강한 캐릭터였나 보다. 아이들은 항상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이야기하고 생각하려는 것 같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엄마라는 이미지를 그려본다. 때로는 지구 제곱만큼 사랑을 주면서 동시에 엄할 때는 염라대왕과 호각을 견줄 정도로 무서워지는 사람. 거의 모든 엄마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미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탈의실에서 나와 개인 사물함에 운동화를 넣으러 가는 길. 사물함이 늘어진 복도를 따라 수영장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이 있다. 그리고 유리창 너머로 수영장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자도 없는 곳에서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저승사자보다 강하고 어쩌면 염라대왕보다 강할지 모르는 어머니들일 것이다.
뒤돌아 서 있는 어머니들 옆을 지나가며 그들의 눈빛을 상상해본다. 행여나 아이가 다치진 않을까? 하는 걱정 어린 시선인가? 선생님들에게 우리 아이 잘 가르쳐 달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아이가 언제 손을 흔들며 아는 척할지 모르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중의 눈빛인가? 질문 하나에 눈빛 하나가 그려지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한 데 섞인 눈빛을 상상해보니 염라대왕의 눈빛 대신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릴 적 내가 수영장을 다닐 때에도 할머니는 이렇게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항상 유리창 너머로 할머니는 같은 자리에서 나를 보고 계셨기에 내가 손을 흔들면 곧바로 손을 들어 보이셨다.
옛날 생각을 하며 다시 수영장을 바라보니 유리창이 한없이 두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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