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의궤도

차가운 분노

글의궤도 2호

by 유영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이제야 분노가 조금 가신다.


지난 금요일 정신없는 지하철 출근길에서 한 여자분께 추근덕거리는 남자를 봤다. "누구야, 누구 맞지?" 하면서 위협적으로 여성분께 다가갔다. 딱 봐도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고 그저 그분께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다. 키 크고 덩치 큰 남자가 갑자기 다가오니 여자분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면서 그런 사람 아니라고, 자기 아니라고 두려운 표정으로 말하셨다.


잠실역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고 주위에 공익근무요원도 있어서 내가 나서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그 분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공익요원의 대처도 미적지근해서 남자한테 다가갔다. 공익요원은 우리한테 저 분은 원래 저러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원래 그러는 사람이면 무례한 행동을 해도 무조건 이해하고 참아야 하는건가?


"저기요, 사람 잘 못 보신 것 같아요. 여자분 불쾌해하시니까 가세요." 최대한 단호하고 차갑게 남자에게 이야기했다. 남자는 뭐라고 궁시렁거리면서 여자분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말했다. "말 걸지 말고 가세요. 그냥 빨리 가세요."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니 남자는 마지못해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분은 너무 놀라신 나머지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나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얼굴에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당황하고 무서우셨을지... 이제 괜찮다고 잠시 토닥여드린 후 나도 갈 길이 바빠 서둘러 환승을 하러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아까 추근덕거리던 남자가 이번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요. 그쪽 사진 찍어도 돼요? 말 걸어도 돼요?" 속으로 잘도 찍어도 되고 말 걸어도 되겠다 싶었지만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안돼요. 갈 길 가세요."라고 말한 후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 남자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지만 불쾌함은 계속 남았다.


남자는 어쩌면 장애가 있거나 정신 질환을 앓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사실이 남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위협하는 행위의 변명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본 그 남자는 자기보다 만만해보이는 여성에게만 말을 걸고 집적댔다. 자신과 키와 덩치가 비슷한 남성에게는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이전에 나는 남성들의 추근거리는 행위나 성희롱적인 발언에 아무 말도 못했다. 심장이 빨리 뛰고 너무나 무서워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떨기만 했다. 지금은 내가 예전보다는 강해졌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나설 수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여성이 겪어야 하는 위협과 위험한 상황들에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난다. 관객의 취향 대표님께서 쓰신 글처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차갑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런 상황은 내게 불쾌함과 분노를 남긴다. 눈물이 나고 몸이 떨리지는 않지만, 피가 식는 것 같은 차가운 분노. 나는 앞으로도 그런 상황에서 꼭 나서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계속 지치지 않고 분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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