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어요
가끔 만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보면, 참 난감하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라고 묻는 사람은 나름대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일 것이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쁠 만큼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며, 돈도 잘 벌고 있으시죠?"라는 의도로 물어보는 것 같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이면 바쁠 것이고, 돈을 잘 버는 사람도 바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네, 바빠요"라고 정말 이야기하기가 싫다.
나에게 바쁘다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24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하려면 "~~ 할 시간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럼 사람들이 물어보는 것은 어떤 시간에 관한 것일까?
내 머릿속의 "시간이 없다"의 시간은 "여유 시간"이다.
여기서 "여유 시간"이란 그냥 남는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여유 있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시간,
나를 위해 하루 1시간 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스트레칭을 할 수 있는 시간,
남편이 영화 보자고 하면 같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
자기 전 30분 이상 내가 원하는 책을 볼 수 있는 시간,
친구들과 가끔 브런치를 먹으며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
부모님이 뭐 먹고 싶다 하시면 사다 드릴 수 있는 시간,
어쩌다 동생이 놀러 오면 하루종일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
딸아이와 드러누워 노닥거릴 시간..
이런 여유 시간이 없이 사는 것이 "바쁘다"는 것이라면, 난 정말 바쁘다고 대답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매일 그날 꼭 해야 할 일들을 하느라 산책을 못 가는 날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바쁘지 않아요"라고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의아해하거나, 예상치 못한 답변에 말문이 막힐까 봐 그냥 대강.. "네, 뭐 , 적당히..." 하며 말을 얼버무리곤 한다.
"바쁘시죠?"는 어쩌면 그냥 How are you? 같은 말이고
상대방은 진짜 내가 바쁜지, 여유로운지 보다는 그냥 "I am fine thank you"와 같은 대답을 할 것으로 기대할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제 기분은 사실은 이렇고 저렇고..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대화의 흐름을 끊을 수도 있기에 그냥, 바로 다움 주제로 잘 이어질 수 있게 "네, 뭐, 좀.. "하면서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늘 머릿속에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 안 바쁘고 싶은데, 왜 자꾸 바쁘냐고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돈과 시간을 같은 선상에 두고 본다면, 그리고 "바쁘시죠?"는 "여유시간 없으시죠?"와 같은 말로 이해한다면 이 질문은 좀 우습게 느껴진다.
우리가 "여윳돈 없으시죠?"라고 물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에 "여유 시간 없으시죠?"라는 질문은 꽤 잘 통용되는 것 같다.
혹시 나만 "바쁘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바쁘다= 1. 해야 할 어떤 일이 있어서 시간적 여유가 적다. · 2. 무엇 때문에 아주 급하다.
결국 "바쁘시죠?"를 사전적으로 풀어보면
"시간적 여유가 없으시죠?" "일 때문에 급하시죠?" 이런 뜻이 된다.
지금 뜻을 다시 적으면서 보니 "바쁘시죠?"란 말을 "다른 일을 맡으실 여유가 없으시죠?"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조금 더 편안할 것 같다.
매번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지 형식적 대답을 마친 이후에도 고민을 많이 했다.
"안 바빠요!"라고 하면 질문한 사람이 당황할 것 같다. 이건 마치 "돈 없으시죠?" 하는데 "아니거든요, 저 돈 많거든요!!"라고 대답하는 모양새다. 진짜 부자라면 이렇게 대답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네, 바빠요" 하면, "네, 저 여유시간도 없이 힘들게 살아요"라고 하는 것 같아 내가 싫다.
이런 고민의 결과로 만들어낸 대답이 바로 "바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이다.
열심히 사는 것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나를 관리하고, 열심히 가족과의 관계도 챙기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과 대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삶은 여유로운 삶, 다시 말해 바쁘지 않은 삶이다.
이미 바쁘지 않은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훨씬 겸손하고 좋게 느껴진다.
나도 다른 분들을 만나면 "요새 많이 바쁘시죠?"라고 물어보기도 한다.
마치 "How are you?"처럼 매번 대화의 시작에서 많이 쓰이니까, 내 입에도 습관처럼 붙어있나 보다.
다른 좋은 인사말도 고민해 두어야겠다. "요새 재밌게 잘 지내시죠?"는 어떨까?
뭔가 타인의 상황도 모르면서 "재밌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부적절해 보인다.
코칭의 질문들을 생각해 봤다.
코칭 수업에서 열린 질문을 하라고 배웠다.
"바쁘시죠?" "잘 지내시죠?" 등은 "네,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닫힌 질문이다.
그보다는 "요사이 어떻게 지내세요?"처럼 열린 질문이 좋겠다.
그러고 보니 결국 "How are you?"로 돌아왔다.
역시,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앞으로는 "요사이 어떻게 지내시나요?"라고 물어봐야겠다.
그리고는 "I am fine thank you"를 기대하지 말고, 경청해야겠다.
"바쁘시죠?"라는 질문에서 느꼈던 당혹감은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질문의 모양새 때문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