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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희 Jun 19. 2024

모순

인생은 모순인가?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누군가의 러브스토리를 듣는 것은 늘 재밌다. 

그 사랑의 이야기가 구구절절할수록 더욱 재밌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의 첫사랑 이야기가 나른한 오후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한 남자가 있었다.

한 여자를 보았다.

그녀를 소개해 달라고 했고, 그녀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남자가 편하기는 했지만, 내 남자란 생각은 안 들었다.

남자의 구애를 여자는 여러 차례 거절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 여자는 몇 번의 연애를 실패하고 혼자가 되었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다이어리를 쓰던 어느 날 갑자기 그 남자가 생각났다.

못 견디게 그리웠다.


지금 다시 연락하기엔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들이 모질었다.

그렇게 그림움을 정리하고 또 삶을 살았다.


어느 날 그 남자의 직장 근처에서 열리는 공연을 가게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간 자리인데, 같이 가기로 한 언니가 그날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

약속을 하면 안 지키는 언니가 아닌데 이상했다.

뭔가 그 자리가 그 남자를 위한 시간이란 생각이 들어 용기 내어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달려왔다.


그 남자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렇게 그 둘은 긴 세월을 각자 보내고 다시 만났다.

만약 20대 때, 그 남자를 보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세 여자가 나눈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였다.


안진진이란 여자가 있었다.

그녀에겐 능력 없는 아빠를 만나 억척같이 살고 있는 뽀글 머리 엄마와, 세상 반듯한 모범생 남자를 만나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이모가 있었다. 엄마와 이모는 쌍둥이였지만 그 인생은 너무나 달랐다.


안진진에겐 두 남자가 있었다.

아빠 같은 남자와 이모부 같은 남자.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안진진은 아빠 같은 남자를 선택했다. 아니 거의 선택할 뻔했다.


이모에게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모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진진은 선택을 바꾼다.

이모부 같은 남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모순이다.


나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항상 왜 이 소설의 제목이 그것인지 알아내려고 하는 편이다.

김훈의 "공터에서"는 읽고 나서도 왜 제목이 공터에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양귀자의 "모순"은 책의 내용 자체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그 제목이 "모순"이 아니면 또 무엇일 수 있을까 했다. 더구나 책에는 실제로 "모순"이라는 단어가 사용하는 문장도 있어서 더욱 명확해 보였다.


안진진이 갑자기 찾아와 데이트를 하자고 한 이모와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그때 이모는 로마에서 먹은 스파게티 맛을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안진진은 당연히 이모부와 같이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로마에서의 이모부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이모는 로마의 이모부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모부는 여행 가서 장소별 사진 3장씩만 찍고, 돌아와서 사진 정리, 지출 정리를 한 후 바로 잠이 드는 사람이었다. "이모는 마치 제목만 있고 본문이 없는, 텅텅 빈, 기이한 소설책을 펼치고 망연자실해하는 소녀의 표정"을 지으며 이모부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다.

이에 안진진은 "이모부만큼 성실하고 자상하게 아내를 챙기는 사람은 더 이상 본 적이 없다. 이모부는 심심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돌출을 못 견뎌하고 파격을 혐오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며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안진진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략)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점이 딱 6개 찍혀있다)"

언젠가부터 책의 본문만큼이나 저자의 말이 재밌게 다가온다. 저자 양귀자는 언제나 소설을 쓰면서 메모 노트를 적는다고 한다. 

"기계의 글자판을 두들기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보면 손가락이 치고 있는 내용과는 관계없는, 그러나 소설의 뒤나 앞에서 반드시 쓰이거나 쓰였어야 할 문장들이 저 혼자 뚜벅뚜벅 머릿속을 걸어 다니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이런 문장들을 잡아 두기 위해 메모 노트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소설을 마치고 그 메모 노트를 볼 때의 기분을 이야기한다.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수많은 글을 쓰고, 지우고 반복했다. 어떤 글들은 지우기가 아까워서 따로 한 파일에 모아두곤 했다. 결국 많이 쓰이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작가님과 내가 동일한 행동을 했다는 자체만으로 뿌듯해졌다.


저자의 말 7번에 보면 소설의 제목을 모순이라고 하는 것을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추상적 개념어를 가장 구체적인 현실을 다루는 소설의 제목으로 삼는 것이 무겁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결국 우리 삶의 내면이 모두 모순투성이기 때문에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려지는 인간의 삶에 관한 진술로 이 소설을 정의하면 모순보다 더 좋은 제목을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이상 구체성을 띤 제목은 없을 터였다" (1998년 1월에 저자가 쓴 글이다. 저자가 모순을 완성하고 저자의 글을 쓰던 그때, 난 대학교를 마치자마자 회계법인에 입사해서 첫 시즌을 경험하고 있었다. 전표를 책으로만 배운 내가 대기업에 가서 뭘 확인하겠다며 받아 든 전표를 보며 신기해하던 그 시절이다.)

97년 12월에 입사, 98년 1월부터 감사를 시작했다. 전체 동기들 중에 나만 여자다.


98년 여름의 나, 일 안 나가는 날엔 회계법인에서 동기들과 점심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잘 챙겨 먹었다. 손에 걸린 핸드폰이 정겹다.(회사 전화기 들고 나온 거 아니고 내 핸드폰이다)


이렇게 모순이란 제목의 소설이 탄생했고, 나는 또 하나의 모순을 이해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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