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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도 황희두 Dec 30. 2017

여러분은 '누구'를 위한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타인 지향형 인간'에서 벗어나자

다짜고짜 '누구'를 위한 인생을 살고 있냐니? 물론 '타인'을 돕기 위해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먼저 '나'를 위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선 내가 잘되어야 남도 도와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러분 중 진짜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 번쯤은 혹시 내가 '타인 지향형 인간'은 아닌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고독한 군중 - 리스만


'타인 지향형 인간'이란 개인을 움직이는 원천이 타인에게 있는 것,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고 주위 기대에 맞춰 나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현상 등을 뜻하며 리스만(D.Riesman)이 그의 저서《고독한 군중》(1955)에서 처음 사용했다. 


즉,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것과도 같은 의미라고 본다.


그렇다. 우리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장 현재 유행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라는 게임에서도 공동체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본인이 잘한다고 하더라도 팀원들을 쉽게 무시했다가는 패배의 지름길로 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절대 '나' 하나만을 두고 설명할 수 없다. 우리 인생이 그렇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인간은 절대 없다. 


적어도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라면 상사의 눈치를 볼 것이고, 사업을 한다면 고객들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며, 정치를 한다면 유권자들의 눈치(적어도 당선되기 전까지라도)를 보게 될 것이다. 오죽하면 세상에 전혀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우병우 조차도 본인의 장인어른이나 자신을 이끌어주던 사람들에게만큼은 철저히 복종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인생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타인과의 관계, 즉 '타인의 시선'이다.


ⓒ인생공부 / 타인의 시선


필자도 어릴 적부터 꽤나 소신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남들이 다 무시할 때 혼자 프로게이머를 준비하던 시절부터, 악플도 나름(?) 웃어넘겨보기도 했고, 청년 단체를 시작할 때도 주위의 비아냥은 무시한 채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왔다. 마치 나르시시즘 환자처럼 나를 사랑했고 나를 믿어왔다. 그 소신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리더'가 된 이후부터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를 정해 사회 변화를 외치며 짧은 기간이지만 리더의 역할을 맡았다. 그 덕분에 엄청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겉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토록 아끼고 믿던 내면의 나를 잃어버렸기에 성장을 했다고 표현하기도 애매하다.


아무튼 리더가 된 나는 항상 선택의 연속인 상황에 놓였다. 그러다 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 따가운 시선, 차가운 외면 등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내면의 나를 깊은 고독으로 몰고 갔다. 물론, 모든 상황이 이토록 암울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반겨주는 다수의 환호보다는 소수의 차가운 여론들이 나를 옥죄어 왔다.


그러다 보니 앞전의 소신 있던 나는 어느 순간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고, 타인의 눈치만 보는 '타인 지향적 인간'으로 변해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이다. 때로는 '이건 정말 아닌데?' 싶은 경우도 있었지만,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제대로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타인에게 욕을 먹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게다가 최근에는 멘탈이 썩 좋지 아니한 상태에서 일베의 무차별적인 비난까지 당한 탓에 완벽한 쫄보로 전락하고 말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들이 뭐라 하더라도 '나'의 인생을 즐기며 여유 넘쳤던 내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완벽한 '타인 지향형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물 흐르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변했기에 나 조차도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했는지 전혀 판단할 수가 없다. 물론,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한 번 나락으로 빠지니 멘탈이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열정에 기름붓기 / 쇼펜하우어


그러나 오랜 고민 끝에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지 남이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쇼펜하우어도 말했듯 남의 시선의 노예, 즉 '타인 지향형 인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처럼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신경 쓰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본인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과연 나는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내가 가장 크게 의식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부모님, 선생님, 교수님, 친구 등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도 '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건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다. 결국, 모든 판단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속한 조직이나 모임에서 소외되고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늘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무척 자연스럽게 '타인 지향형 인간'으로 변해버린다. 그 조직이나 모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결국 거기서 살아남을지라도 영원히 그들의 시선과 눈치 속에 살아가게 된다. 이게 올바른 인간관계라고 보이는가?


ⓒ성장문답 / 윤대현 교수


우리는《미움 받을 용기》라는 저서에서 나오듯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해야 한다. 또한 과도하게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킬 필요도 없다. 인생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챙기기에도 시간이 무척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했듯이 우리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타인을 아예 배제하고 살아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자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타인의 목소리에 귀는 기울이되 너무 타인의 시선에만 의존하지 않는, '나'도 공동체 안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의견을 밝히고 소신 있는 삶을 살자는 뜻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고민을 시작하면 '우유부단'과 '경청', '소신'과 '아집'의 정확한 차이는 무엇일까?라는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무척 즐겁지 아니한가. 이토록 끝없는 고민이 펼쳐지는 골치 아픈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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