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로 태어나 당연히 누려온 혜택들을 벗어던지며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다.
과분한 사랑을 받은 이유는 머리가 좋아서, 돌잡이 때 돈을 잡아서도 아니다. 그저 단순히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선대 어르신들은 남자를 무척 귀하게 여겼고, 심지어는 어머니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바로 '아들'이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적지 않은 혜택과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할머니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한 덕분에 나의 하나뿐인 여동생은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 자라왔다. 어린 시절, 이런 차별들을 잘 알았지만 '남아선호 사상'을 당연시 여기며 살아왔다. 왜 그런 혜택을, 사랑을 받는지도 전혀 모른 채 말이다.
이런 불합리한 사회 분위기에 부조리를 느끼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자아가 깨어나고, 의식도 서서히 탄생하며 성인이 되었으나 한참이 지나서도 이런 문제를 전혀 느끼지도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내가 무심코 해온 발언과 행동이 수많은 여성들을 분노케 만들었을 것이란 사실이 무척 후회됐다. 몇 달 전부터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읽은 후 그마저도 제대로 된 공감에서 나온 관심이 아니란 사실도 깨달았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내내 구역질 날 정도로 분노를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아들이 있어야 한다.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 아들이 둘은 있어야 한다……." 뱃속에 있는 세 번째 아이가 딸이면 어쩔 거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아버지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라고 대답한다.
- 잠 깨는 약을 수시로 삼켜 가며 누런 얼굴로 밤낮없이 일해서 받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 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과거 여성들은 이러한 차별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과연 이렇게 모든 사랑이 아들로 향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저 과거부터 내려온 당연한 풍습이라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지 아니한가.
-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태어난 김지영이 막상 여자인걸 알자 돌아온 것은 '다음에 태어나길 바라는 아들'이었다.
- 남학생들과의 불합리한 차별을 문제 삼은 한 여학생에게 돌아온 것은 '오리걸음'이었다.
- 바바리맨을 근처 파출소로 끌고 간 용기 있는 여학생에게 돌아온 것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학교에 망신을 준 여자'라는 타이틀이었다.
-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치한에게서 겨우 도망친 김지영에게 돌아온 것은 '여자가 조신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였다.
- 한 남자와의 결별 후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씹다 버린 껌'이라는 조롱이었다.
- 육아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한 김지영에게 돌아온 것은 "도와줄게"라는 위로뿐이었다.
육아가 여자는 당연하고, 남자는 도와주는 것이 지당한 사실인지 우리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아니, 어쩌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둘이 서로 사랑해서 낳은 자식이 아니었던가.
육아 후 달라진 일상과 모든 게 예측 불가능해진 김지영에 몰입해 하나가 되는 순간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단순히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모든 걸 포기해야만 하는 이 현실이 서럽고 무서웠다. 그러나 더 무서운 건 이러한 현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빠른 속도로 사회가 변하고, 수많은 차별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김지영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이를 낳으면 잃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니 얻는 것도 생각하라는 남편에게 지영은 묻는다. 그러는 오빠는 무엇을 잃느냐고. 그렇다. 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전부 잃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남성들은 무엇을 잃는가.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워지긴 할 것이다. 물론, 본인의 꿈과 계획, 사회적 네트워크 등은 그대로 유지된 채 말이다.
'아무것도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모든 것은 어머니의 책임이었고, 온몸과 마음으로 앓고 있는 어머니 곁에는 위로해 줄 가족이 없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모성애'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한 채 모든 어머니들을 옥죄어 왔다. 이는 마치 '국가를 위해'라는 명분을 세우고 온갖 불합리한 차별을 저질러온 자들과 크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직장 상사들이 외모 비하, 성적 농담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수많은 김지영을 괴롭히고 있다. 본인이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소중한 딸도 언젠가 본인 같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대우를 받을 거란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이런 무수한 차별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알려고 하는 의욕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본인이 누려오던걸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지 않을까?
혼자 깨어있는 남성이 되고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툭하면 '군대'와 '역차별'이라는 같잖은 무기를 장착한 채 갑론을박 중인 사람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아직까지도 82년생 김지영이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지, 우리 곁에 살고 있는 수많은 김지영이 안 보이는지, 그 많은 김지영 중 한 명이 바로 본인을 낳아준 어머니라는 사실은 아는지 말이다.
적어도 단 한 번이라도 이 시대의 김지영에 몰입해봤다면 근거도, 출처도 모르는 이러한 차별 문화를 이어가자는 생각은 못할 것이다. 물론 해서도 안 된다.
소개팅에서 의자를 빼주고, 차도 쪽으로 걷고, 핸드백을 들어주고, 수컷 냄새 폴폴 풍기며 힘 자랑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곁에 수많은 김지영이 어떻게 살아 가는지 알아보는 게 급선무다. 적어도 급변하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수의 김지영이 사회에 목소리 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끙끙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내가 감히 페미니스트라고 쉽게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프로 불편러'는 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