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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도 황희두 Mar 07. 2018

미투 운동, 잃어버린 평등을 찾아서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가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으로 들썩이고 있다.


 미투 운동을 통해 고은, 조재현, 조민기 등 권위자들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났다. 심지어 유력 대권 주자에서 하루아침에 성폭행범으로 전락해버린 안희정 씨를 보며 많은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를 통해 평소 무관심했던 사람들까지도 미투 운동의 중요성을 제대로 느꼈다.


 나 또한 사람을 절대 겉모습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으며, 나이를 떠나 인간의 성욕은 정말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성차별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소년중앙 / 수렵채집 사회

 

# 성차별의 시작


 수렵채집 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농경과 목축이 남성 고유의 일이 되고, 생산물을 독점하면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남성은 힘들게 채집한 생산물을 친자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당시 친자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자연스레 여성에게 다른 남자와의 성관계를 금지시켰다. 여기서부터 '여성은 정조를 지키고 가정에 충실하며 남성의 대를 잇는 것'여성 최고의 임무로 변했다고 한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수천 년 전부터 성차별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무너질만한 얕은 성벽이 아니란 의미다. 일본의 한 저명한 페미니즘 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이제까지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여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욕망, 즉,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 우에노 치즈코


  즉, 여성 관련한 지식의 모든 기준은 '남성'이었으며 '여성'을 대상화하여 판단한 것이라는 의미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자기만의 방』에는 "예를 들어 남자가 문학 작품 안에서 단지 여성의 연인으로만 묘사될 뿐, 다른 사람들의 친구나 군인, 사상가, 몽상가로 전혀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해봅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그들에게 돌아가는 역할이 얼마나 적었을까요. 또 문학은 얼마나 타격을 입었을까요! …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결혼하고, 방 한 칸에 갇혀 생활하고, 한 가지 일만 해야 하는 여성을 극작가가 어떻게 온전하게, 또는 흥미롭게, 또는 진실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라는 말도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핍박받으며 구속된 삶을 살아왔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 기울어진 운동장


# 중립은 없다


 - "저는 중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립을 외친다. 절대 중립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립을 외치는 것은 중립인 '척' 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젠더 문제에 조금이라도 부조리함을 느꼈다면 변화를 추구해야 하고, 이게 싫다면 그냥 기존의 관습을 유지한 채 살아가면 된다.


- "그렇게 꼬우면 남자로 태어나든가?"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과연 이게 옳은 주장일까? '부모도 능력'이라던 정유라를 옹호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 "그럼 남자가 역차별당하는 거 아냐?"

  역차별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차별인지 아닌지 영원히 판단할 수 없으며, 가만히 팔짱낀 채 중립만 외치는 자들의 정당성만 부여해줄 뿐이다. 역차별을 통해서만 모든 게 남성 기준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남자가 역차별당했다고 치자. 아주 잠시도 차별당하기 싫어하면서 수천 년간 암흑의 시대를 살아온 여성들은 어떻게든 외면하려는 것 같아 무척 안쓰러울 뿐이다. 만약 본인이 떳떳하다면 '펜스룰' 같은 걸 지지하면서 애써 여성들과 거리를 둘 필요도 없다.


ⓒ부산일보 / 미투 운동(#Me Too)


# 고독한 피해자와 페미니스트


 앞으로도 미투 운동을 통해 새로운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꾸준히 등장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용기 내지 못한 채 덜덜 떨며 가해자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이다.


 만약 피해자가 평범한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쉽게 폭로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다. 우선 주위 사람들도 쉬쉬하려는 분위기일 가능성이 높다. 혹여라도 가해자가 사내에서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이 피해자의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용기를 낸다면 주위에서 함께 힘을 합쳐 권위에 맞서 싸워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페미니스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비난하는 자들은 기존의 잘못된 관습과 낡은 사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조차 결여된 사람들이니 말이다.


ⓒ 뉴욕의 왕실 동상 파괴

# 잃어버린 평등을 찾아서, 우상의 파괴


 이어령 선생은 과거 <우상의 파괴>를 통해 '무지몽매한 우상을 섬기기 위해 그렇듯 고가(高價)한 우리 세대의 정신을 제물로 바치던 우울한 시대는 지났다. 그리하여 지금은 금 가고 낡고 퇴색해 버린 우상과 그 권위의 암벽을 향해 마지막 거룩한 항거의 일시(一矢)를 쏘아야 할 때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로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잘못된 우상들이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낡은 사상을 가진 우상을 파괴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아니, 이미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본인이 시대에 뒤쳐진 '꼰대'가 되싶다면 눈과 귀를 닫은 채 살아가도 좋다.)


 물론 오랜 세월 쌓여온 문화가 하루아침에 변할 것이란 기대는 하지도 않는다. 멀리 내다보며 모두가 잃어버린 성평등을 위한 첫걸음을 떼는 순간, 그것은 역사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현재 역사 변화의 중요한 지점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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