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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도 황희두 Jun 11. 2018

[황희두 에세이] 말할 수 없는 비밀

살다 보면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쯤은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하는 거 같다

오늘 오랜만에 반차를 썼다. 

나는 모처럼 생겨난 여유로운 오후 시간대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 짧은 고민 끝에 사랑하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로 다짐했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어릴 적부터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셨던 사람이자,

이 세상 가장 행복했던 사람에서 한 순간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린 우리 할머니를 만나러.


평소였다면 설레고 가벼운 발걸음이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행복과 우울이 공존하는 그런 심정이랄까.

오랜만에 사랑하는 할머니를 본다는 설렘과,

동시에 아버지께서 잘 살고 계신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들었기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지만

우리 할머니께선 여전히 아버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신다.

실제로 할머니께서는 작년 말부터 연락이 없어진 아버지로 인해 우울증에 빠지셨다고 한다. 

매주 안부 인사를 잊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부터 연락을 안 했으니 그럴 수밖에.


아버지께서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할머니의 말을 거역해본 적이 없었고, 할머니께서는 그런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러니 할머니의 속상한 마음은 오죽하실까 싶었다.

결국 세상 제일가는 효자였던 우리 아버지께서는 한 순간에 세상 제일가는 불효자가 되어버리셨다.


착잡한 심정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할머니가 계신 김포에 도착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라.  아이고 마.. 이게 얼마만이고."


할머니께선 나를 보시자마자 손을 꼭 잡은 채 행복해하셨다. 눈가는 촉촉이 젖은 채로.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지?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래이..."

"할머니 오랜만에 와서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께서는 사업 때문에 중국에서 정신없이 지내고 계세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시는 할머니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참았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슴 깊이 묻은 채로 나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아버진 작년 겨울에 먼저 떠나셨어요.'


할머니께선 여전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눈치였지만 끝까지 나는 말씀드릴 수 없었다. 아버지를 원망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살다 보면 무엇이든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아버지는 얼마나 억울하실까.

나는 아버지께서 새벽마다 눈물을 머금은 채 할머니 영상만 무한 반복하시던 뒷모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완치하고 할머니를 찾아뵐 계획이었겠지만 끝내 아버지께서는 전화 한 통 드리지 못하고 떠나셨다. 물론 나는 안다. 

큰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께서 충격으로 한 달 후에 돌아가신 과거로 인해,

투병 중이신 할머니께서도 충격으로 쓰러지실까 봐 차마 연락을 못하셨다는 사실을.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하는 아버지도 서울 오시면 빨리 만나셔야죠...."


헤어질 즈음, 나는 할머니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홀로 먼 길 떠난 아들과 아무것도 모른 채 남겨진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먼 훗날 할머니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되는 날 모든 사실을 알게 되겠지.


'할머니.. 죄송해요. 아버진 작년 겨울에 먼저 떠나셨어요.'


수십 번 곱씹어보지만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

살다 보면 누구나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쯤은 간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인생을 살면서,

인간에게 가장 무거워야 할 것이 입이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더 와 닿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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