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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허브 Nov 13. 2020

공정한 노동 환경에서 평등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2020 N개의 공론장⑪ <일러스트레이터의 목소리> 사전 인터뷰

인터뷰 일자: 2020년 11월 1일

인터뷰이: 이요안나

인터뷰 및 편집 : 금혜지(N개의 공론장 아키비스트 그룹)


마트 장난감과 문구류 코너를 가면 곁눈질로 보아도 ‘여아용', ‘남아용' 제품이 확연하게 나뉘어 있죠. 게다가 그를 상징하는 색깔과 모양은 굉장히 한정적이고, 제가 어린아이였던 시절과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개인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시기에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미지들이기 때문에, 좀 더 고정관념과 차별에서 벗어난 일러스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놀랍지 않게도,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삶에서의 인식과 일에서의 결과물 사이 격차가 늘 크게 벌어지는 것은 왜일까요? 업계 동료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꼭 필요하다고 느낀 이요안나 일러스트레이터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Q. 안녕하세요,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요안나: 안녕하세요. 패턴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이요안나입니다. 주로 원단에 들어가는 패턴 작업과 제품 패키지 일러스트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그림, 아이들이 보는 그림에도 관심이 있어요. 모두가 평등한 그림 설명을 제공받는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Q. 일러스트레이터 7년 차라고 말씀하셨는데, 처음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신 때부터 페미니즘과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지금까지 직업적 고충이 계속 달라졌을 것 같아요. 공론장을 직접 기획하기까지, 개인적으로 느꼈던 어려움이나 공론장의 필요를 느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이요안나: 저는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는 피아노 학원에서 평생을 자랐어요. 자연스레 그 안에서 아이들이 일러스트를 받아들이고 흉내 내는 모습, 모작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죠. 처음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마음이 급해서 사회 전반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딱 제 반경까지만 보았죠. 그런데 점점 자리를 잡아갈수록 아이들이 보고 있는 그림에 대한 불편함이 제 마음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책과 학습지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세상일 텐데 그 안에 편향적인 시선들이 너무 깊이 섞여있다고 느꼈어요. 제가 자라날 때 그림책과 학습지에서 보았던, 인식하지 못한 채 받아들인 그림 설명들이 30년이 지난 현재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일러스트를 보는 사람인 동시에 그리는 사람이 되기도 했으니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제 반경 밖을 보니 다양한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많은 경우 기획된 일에 투입되어 취지에 따라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실행자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기획에 따른 임무를 충실히 실행해야 하죠. 또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대부분입니다. 결과물을 어떻게 실행했는지에 따라 다음 스텝이 결정되다 보니 더욱 가치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 직업인 것 같아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클라이언트의 눈치를 보는 일들도 많습니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업계 상황과, 사회 전반에 깔린 낮은 저작권 인식으로 인해 단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한 처우를 당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하는 일은 대량생산제품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이거든요. 환경에 대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큰 기업을 클라이언트로 두고 싶어 주말을 포기하며 스스로를 갈아 넣기도 합니다. 항상 마감에 쫓기고, 마감이 없는 날에는 더 나은 그림을 위해 스스로 노동력을 착취하며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다 보니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목소리는 모으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딩과 단가경쟁으로 서로의 살을 깎아먹도록 내몰리는 경우도 허다하니까요. 


그래서 환경, 동물권, 인권, 노동권 등에 대한 감수성은 있지만 일과 삶을 분리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사상을 검증하고, 프리랜서가 불평하면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니까요. 문제점은 알겠는데 어떻게 확성기를 켤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목소리와 사례를 저도 알고 싶고 공유하고 싶어서 공론장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Q. 프리랜서가 많은 업계 특성상 참여진을 모으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공론장 준비 초기 단계에는 공기업 직원, 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이해관계자들을 섭외하려고 하셨다고 들었어요. 섭외나 초대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이요안나: 처음에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다양한 사회참여 활동을 시도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공론을 통해 좋은 사례를 모아 사례집을 제작해 배포하고 싶었어요. 우리 업계 안에서 넓은 범위의 사회참여 방향을 논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공기업 직원, 예술가, 출판사 직원 등 다양한 분야의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공론장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서로 다른 장르의 선배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만나며 자문을 받아 질문을 모으는 과정에서 ‘일러스트레이터의 권익‘을 외치는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 보다 현저히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료 일러스트레이터들, 신입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목소리도 그쪽으로 쏠려 있었어요. 


우리의 고민이 아직 작업실 문턱을 넘어서기 쉽지 않은 상황임을 알게 되었지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정당한 페이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저작권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직업병을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고, 제도의 사각지대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창작자들, 창작자의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을 먼저 모으는 방향으로 섭외와 초대 범위를 좁히게 되었어요. 그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가입되어 있는 ‘산그림’, ‘일사하’, ‘그라폴리오’를 중심으로 홍보를 진행하였습니다.   



Q. 참가자분들에게 사전 설문을 간단히 받으셨는데, 모이는 의견들을 보며 인상 깊었던 지점이나 들었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이요안나: ‘불편한 일러스트’ 하면 떠오르는 경험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여성혐오’를 말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습지의 일러스트, 캐릭터, 그림책에서 성역할을 주입시키고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을 교육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현재 업계에는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의 비율이 더 높거든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개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인식을 하고 있는 지점인데도 여전히 문제가 바뀌지 못하는 이유, 혹은 바뀌는 속도가 이토록 더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또 다른 답변의 갈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권익‘이었습니다. 시장의 단가와 낮은 저작권 인식으로 인하여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 부분이 오랜 시간 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이 일을 계속하고 싶지만, 과연 계속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어떤 분들이 오셨으면 하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으면 하는지 등.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요? 

 

이요안나: 다양한 연차, 다양한 장르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오셔서 불편함을 나누고, 이를 지혜롭게 해결해 나간 사례들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나눈 경험과 생각들이 휘발되지 않고 축적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자유롭게 부탁드립니다.

 

이요안나: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선배 일러스트레이터들과 관계자분들이 있습니다. 작업실과 작가 모임에서 문제점과 방안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원하는 것은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일을 오랫동안 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작업환경을 위하여, 작품을 지키기 위하여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사전 인터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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