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이름, 엄마

나만의 행복을 찾아 떠난 길 위에서 써 내려간,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by 유란

성공 대신 성장하러 나왔습니다

나만의 행복을 찾아 떠난 길 위에서 써 내려간,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어제는 오랜만에 아빠에게 다녀왔다.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한달이 넘었으면서 이제서야 찾았다.

사실 바쁘다는 핑계로 엄두도 못내다가 근처에서 일정이 있는 김에 아빠한테도 다녀온 불효녀.


다른 일정이 있음에도 아빠에게 가는 길에 부득불 엄마를 모시고 갔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습기를 잔뜩 머금은 하늘이었음에도 부득불 엄마를 모시고 간 이유는, 잠깐이라도 엄마에게 바깥 공기를 쐬게 해드리고 싶어서.


나보다 친구가 많고, 찾는 사람이 많아 늘 약속이 많은 엄마를 부득불 끌고 나와야했던 이유는..

한달 전부터 우리 집에 갑작스러운 새식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엄마의 엄마.




엄마의 엄마, 나의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다.

내가 모로코에 있는 동안 며칠 엄마가 연락도 잘 안됐는데, 이모의 "할머니도 나이도 있으신데, 언제까지 외국에 있을 거야. 와서 얼굴 보여줘야지."하는 말에 계속 엄마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너 걱정할까봐 말 안하려고 했는데..." 하면서 어렵사리 입을 뗀 엄마의 말에 전화를 끊고 혼자 사하라 방에서 한참을 울었었다.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신지 좀 됐다는 소식. 손녀 돌보랴 할머니 병간호하랴 정신이 없어 연락이 잘 안됐었다며 미안하다는 엄마의 말.


그렇게 한달여가 흐른 후 한국에 도착했다.

늘 공항으로 마중나오던, 이번에도 꼭 마중을 나오겠다던 엄마가 연락이 안됐다.

거의 백키로에 육박하는 짐을 이고지고 모로코에 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어서, 나올 필요 없다고 이제 혼자도 캐리어 두 개쯤은 별 거 아니라고 했는데도, 굳이굳이 새벽같이 공항으로 마중나오겠다던 엄마가 연락이 없다. 공항리무진 타고 집으로 가면 되는데, 혹시나 엄마랑 길이 엇갈릴까 싶어 계속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다시 걸었을까, 겨우 전화를 받은 엄마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지금 나가려고,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한다. 나는 내심 서운했던 마음도 잠시 엄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이미 리무진 티켓 샀으니 오지 말라고 만류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 나 왔어!"


며칠만 어디를 다녀와도 얼마만에 우리 딸을 보는 거냐며 뛰쳐나와 나를 꼭 안고 이리저리 쓰다듬던 엄마가 없다. 엄마! 하고 불러보니 겨우 비척거리며 현관으로 나오는 엄마를 보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지난 반년간 꽤 자주 영상통화를 하면서 엄마를 봐왔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엄마는 너무 작고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몇 년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너 짐도 많고 힘들었을텐데 미안해. 꼭 너한테 가려고 할머니 병간호도 이모한테 부탁했는데..."


모로코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더 큰 세상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면서 밖으로 나가 지내며 정작 나의 엄마가 이렇게 작고 연약하게 변해가고 있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자책과 정작 내 가족은 못 챙기고 있었다는 좌절에서 오는 자괴감이 나를 감쌌다.




엄마의 삶은 늘 그런식이었다.

나 보다는 남을 위하는 삶.


지금도 자주 말한다. 내가 이렇게 봉사를 하면서 사는 건 다 엄마 '덕분'이라고.

엄마가 "넌 엄마가 보고 싶지도 않니, 그냥 한국에서 좀 편히 살면 안되겠어?"라고 할 때는 이게 다 어릴 때부터 봉사하는 엄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엄마는 늘 봉사를 다니셨다. 욕심이 많은 나는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은 막내딸이었기에, 대체 나한테 집중 안하고 어디로 그렇게 봉사를 다니냐는거면서 따라 나서기도 했었다. 성가정입양원에서 어린 아기들을 돌보고, 성당에서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하고, 가난한 7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을 가서 가족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으며, 매달 있는 제사도 불평없이 해오던 엄마.


그때마다 나는 늘 툴툴거렸었다. 엄마는 왜 내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을 돌보냐고. 친척들 일에 왜 다 엄마가 희생해야 하냐고. 나는 절대 제사 지내는 집 장남에게는 시집 가지 않을거라고. 엄마 힘들게 하는 사람들 다 싫다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게 "엄마는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임에, 도울 수 있는 일임에 감사해." 라고 말해주셨었다. 그래도 내가 계속 다 맘에 안든다고 툴툴 거리면 "유란아. 세상에 착한 끝은 있어. 엄마가 이렇게 살면 그 복은 다 너희한테로 갈거야." 라는 말로 나를 달래곤 하셨다.




그런 엄마였기에, 아빠가 1년 반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넘어 5년이나 더 살다 가실 수 있었겠구나 싶다. 아빠는 정말 생의 마지막 두 달 정도를 남겨놓았을 때까지 계속 학교 생활과 투병 생활을 병행하셨었다. 아픈 아빠 자신이 제일 힘들었을테지만, 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빠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모든 생활을 다 함께해낸 그러면서도 늘 웃으며 아빠를 보살폈던 엄마의 삶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식들 다 키워서 취업 시키고, 이제 막 인생의 황금기를 즐겨야할 그 때에 아빠 병간호로 5년을 보냈던 엄마가, 이제야 손녀를 돌보는 일에서 졸업한 엄마가, 혼자 움직일 수 없는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울면서 엄마를 만류했다.


이러면 정말 엄마 인생 끝나는 거라고. 아빠 돌보다 몸도 마음도 다 상하고, 아무리 예쁜 손녀라도 1년 넘게 손녀 돌보다 이제 정말 팍삭 늙은 할머니가 되어버렸으면서, 다시 또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할머니 병간호를 시작하면. 엄마는 이제 정말 몸 건강할 때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삶은 끝나버리는 거라고. 혼자 거동이 힘든 할머니를 모시고, 나도 몇달 후에 다시 모로코로 나가면 엄마는 집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리는거라고. 내가 이런 엄마를 두고 어떻게 또 내 일을 하냐고. 대체 엄마 인생은 어디에 있냐고 외치는 내게. 엄마도 할머니도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너는 너 일만 하라며 "이번 생은 이렇게 사는 게 엄마의 소명인가 봐."라는 엄마.




어린 시절엔 엄마의 봉사를 받는 이들을 질투하기도 했었지만, 한번씩 봉사하는 엄마를 따라 다니며 나도 모르게 그런 엄마의 모습을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영향으로 학생 때부터 의미 있는 봉사를 하고 싶어 모자원으로 교육 봉사를 다니기도 했었고.


또 내가 할 수 있다면 돕는 게 당연한거라고, 그건 대단하거나 힘든 일이 아니라 감사한 일이라는 엄마의 영향으로 사랑의 리퀘스트를 보면서 열심히 번호를 눌러 기부했었다. 번호를 누르는 건 힘든 일이 아니었고, 돈은 엄마 아빠가 알아서 지불하게 될테니까.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엄마 미안..)


어린시절부터의 이런 수많았던 순간들이 씨앗으로 내 안에 담기고, 거름으로 쌓이고 하면서 지금의 유스피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교육이라는 형태를 띄게 된 것은 교육자이자 늘 나를 도서관으로 서점으로 이끌어주셨던 아빠의 씨앗이자 거름일테고 말이다.




언제나 떠올리면 보고싶고 행복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아릿해지게 하는 엄마라는 존재. 지금의 내 삶을 이끌어갈 수 있게 나를 키워온 나의 지지기반.


엄마 덕분에 이렇게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나의 봉사 현장으로 엄마를 모시고 가고 싶다. 원래대로 였다면 손녀 돌보기에서 졸업한 엄마와 함께 하반기에 모로코에 가려고 했는데..


어제 아빠랑 외할아버지에게 '엄마랑 모로코 갈 수 있게 할머니 빨리 건강해지게 해주세요!'라고 부탁드렸으니, 할머니가 얼른 건강해지시기를!


엄마에게도, 엄마의 엄마가 가장 좋으면서도 슬픈 존재일테니! 부디 나의 엄마도, 엄마의 엄마도, 모두 행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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