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이 글 쓰는 기사가 훨씬 더 읽기 편했다.
저는 글을 쓰며 약간의 용돈을 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글 쓰는 데 재미가 들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글 쓰는 게 재미있어 몇 편의 글을 적다 보니 칼럼도 쓰게 됐고, 기사도 몇 개 쓰게 됐습니다. 작년엔 제 글들을 모아 작은 책 한 권을 내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앞으로 글을 쓰는 재능이 더 이상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쓰는 글이 등장했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전문기자 생활을 한 건 아니라서 어떻게 쓴 기사가 좋은 기사다라고 설명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기사를 쓸 땐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바로 육하원칙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담아야 보도문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럼 이 기사를 한 번 볼까요? ‘두산은 6일 열린 홈경기에서 LG를 5:4, 1점 차로 간신히 꺾으며 안방에서 승리했다. 두산은 니퍼트를 선발로 등판시켰고 LG는 임정우가 나섰다. 팽팽했던 승부는 5회 말 2 아웃에서 타석에 들어선 홍성흔에 의해 갈렸다. 홍성흔은 LG 유원상을 상대로 적시타를 터뜨리며 홈으로 주자를 불러들였다... (중략)... 한편 오늘 두산에게 패한 LG는 7연패를 기록하며 수렁에 빠졌다.’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쓰인 이 기사는 누가 쓴 기사일까요? 이렇게 물어봤으니 ‘사람이 쓴 건 아니겠다.’라고 당연히들 생각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이 기사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 쓴 기사입니다. ‘누가 썼을 것 같냐?’는 질문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이 기사를 처음 접하신 분들 중 절반은 당연히 사람이 썼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 기사를 읽은 기자분들 중에서도 절반은 로봇이 썼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더 놀라운 건 기사를 읽은 독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독자들은 로봇이 쓴 기사가 기자가 쓴 기사보다 더 믿음이 가고(신뢰성), 분명하며(명확성), 잘 읽힌다고 했다더군요.
최근 유튜브, 페이스북을 비롯한 각종 SNS에서 가짜 뉴스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SNS의 ‘좋아요’와 ‘공유’를 통해 무분별하게 퍼지는 글과 영상들 속에 사실이 아닌 이른바 거짓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사실처럼 각인되면서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쩌면 로봇이 쓰는 뉴스는 가짜 뉴스의 대안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쓰는 기사는 어쩔 수 없이 기자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로봇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쓰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인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독자들 사이에서 객관적인 뉴스를 읽고 싶다는 욕구가 커진다면 기사 쓰는 일을 로봇이 대체하는 날은 금방 올 것입니다. 로봇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얼마만큼 획득되느냐가 관건이 되겠죠.
기사보다 좀 더 내용이 많고 풍부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소설은 어떨까요? 2018엔 통신사 KT에서 주최한 인공지능 소설 공모전이 열렸습니다. 총 상금 1억 원이 걸린 이 공모전엔 31개의 팀이 출전했습니다.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이 공개되진 않았지만 이는 국내 인공지능 기술이 창작의 세계로 한 걸음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해외에선 이미 인공지능 기술이 창작의 세계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4년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샤이오스’가 중국에서 시집을 발표했습니다. ‘샤이오스’는 중국 시인 519명의 시를 학습한 뒤 1만여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하였고 그중 139편을 골라 시집을 만들었죠. 일본에선 인공지능이 소설 작가로 데뷔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경험한 즐거움에 몸부림치면서, 몰두해 글을 써나갔다. 컴퓨터가 소설을 쓴 날. 컴퓨터는 스스로의 즐거움을 우선 추구하느라 인간이 맡긴 일을 멈췄다.” 이 내용은 인공지능이 쓴 소설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의 일부입니다. 컴퓨터 스스로를 일인칭의 시점으로 쓴 이 소설은 2016년 요미우리신문에서 주최한 ‘호시신이치상’ 문학상 1차 심사에도 통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온전한 소설 한 편을 쓰려면 아직 멀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인공지능이 의미를 담거나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발표하는 건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의 수준으론 ‘길가에 꽃이 폈다. 그 꽃들이 아름다웠다.’ 정도만 가능할 뿐이죠. 김춘수 시인의 <꽃> 같은 시는 지금의 기술로는 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이 기사를 쓰고, 소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고도의 정치공학이 담긴 정치기사를 쓰는 정치부 기자들은 몰라도 연예뉴스나 스포츠뉴스처럼 육하원칙만 지키면 쓸 수 있는 기자들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현실이 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과, 부패한 권력에 대한 비판, 우리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은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 <한강>은 인공지능이 나타나도 오래오래 베스트셀러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권선징악을 주제로 쓴 어린이 동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는 인공지능이 조만간 충분히 도전해 볼만 합니다.
인공지능이 글을 쓰는 행위가 시사하는 점은 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쓴 글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럼 그 수익은 누가 갖는 게 맞을까요?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판매되는 순간 우린 하나의 질문에 마주하게 됩니다. 누가 그 수익을 가져갈 것이냐는 거죠. 2018년에 AI화가 ‘오비우스’가 그린 그림이 미국 뉴욕에서 한화 4억 9300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 큰돈을 누가 가져가야 할까요? AI 화가 ‘오비우스’가 가져가야 할까요? 아니면 ‘오비우스’를 만든 개발자가 가져가야 할까요? 전자라면 ‘오비우스’는 소득세를 내야 할까요? 후자라면 개발자는 ‘오비우스’가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세금을 내야 할까요? 사실 누가 가져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누가 돈을 벌든 그에 맞는 세금을 낸다면 말이죠.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를 규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인공지능이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법과 제도가 없을뿐더러 사회적 합의도 없기 때문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할수록 기존에 있던 직업들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입니다. 일자리가 로봇에게 대체된다면 우린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요?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은 로봇세를 걷자고 합니다. 걷어서 실직자들을 재교육하자고 주장합니다. 반면 로봇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로봇세를 걷는 것이 기술발전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해 나가고 있고, 그로 인해 돈을 벌 기회가 줄어들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4차 산업시대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의제까진 아니더라도 논의 정도는 우리가 조금씩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논의를 정작 해야 할 정치는 여전히 20세기 이념갈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AI와 로봇이 소득을 벌지도 모르는 21세기인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