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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윤 Nov 01. 2020

노동의 재정의 : 줄어드는 노동시간

인류의 노동시간은 계속 줄어들어 왔다.

 2015년 우리나라 연간 노동시간은 2,285시간이었습니다. OECD 평균 노동시간이 1,770시간이었으니 우린 500시간이나 더 일 한 셈이었습니다. 이후로도 우린 2위였던 멕시코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 1, 2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최근 주 52시간 근로가 민간사업장까지 확대되면서 연간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듯싶었으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여전히 일을 많이 하는 나라에 속합니다. 비록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일하는 나라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이 가장 적게 일하는 시기입니다. 요즘은 토요일을 당연히 쉬는 날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과 16년 전만 하더라도 토요일은 일하는 날이었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앞당기면 일요일에도 일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50년 전 근로시간 단축을 주장했던 전태일 열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여전히 일을 많이 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인류의 노동시간을 바라보면 노동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들의 노동시간도 계속해서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연간 2,285시간을 일할 때 영국은 1,674시간, 프랑스는 1,482시간을 일했습니다. OECD 평균보다도 적게 일한 나라들이었죠. 장시간 일하는 우리나라 직장인 입장에선 영국과 프랑스는 꿈의 나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이들도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차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는 4~5살 꼬마 아이들도 하루 12시간 넘게 일했습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당시 프랑스의 노동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잘 알 수 있죠. 이처럼 인류의 노동시간은 역사가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미래엔 더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인류의 노동시간은 왜 줄어든 걸까요?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의 노동시간이 줄어든 건 지나치게 길었던 노동시간에 저항했던 노동자들 덕분이라고.” 맞습니다. 지금 우리가 주 52시간씩 일할 수 있게 된 건 노동시간을 줄이고자 노력했던 장발장, 전태일 열사 같은 분들 덕분입니다. 이분들의 숭고한 노고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가장 큰 원인은 기계(자동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차 산업혁명 때 등장한 기계는 사람의 일자리를 위협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노동자들은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으로 이 위기를 넘기려고 했죠. 그러나 사람보다 생산성 좋고 효율 높은 기계를 이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은 기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모색합니다. “기계 부수는 일을 중단하고 기계를 인정하겠다. 대신 노동시간을 전보다 줄이고 늘어난 생산량만큼 임금을 높여달라.” 그런데 이 주장은 자본가 입장에선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을 겁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높이면 자본가 입장에선 적자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타협점을 찾은 게 아동의 노동 금지였습니다. 모두의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임금을 올린 순 없으니 아이들을 노동시장에서 배제시킨 겁니다. 그리고 자본가는 아동 임금을 성인 노동자에게 지급하기로 합니다. 즉, 임금 상승이 일어난 것이죠. 아이들이 일을 그만두었으니 가정의 전체 노동시간은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임금은 올려달라”던 노동자들의 주장이 이루어진 것이었죠. 이게 영국의 공장법입니다. 

 영국은 공장법에 따라 9세 미만 아동의 노동을 금지합니다. 또 18세 이하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엔 제한을 둡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건강권과 학습권이었을 겁니다. 성인들도 하루 10시간 노동은 힘든데 아이들까지 장시간 일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겠죠. 또 국가적 차원에서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더 이익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겁니다. 아이들이 하루 10시간 공장에서 일하면 미래에 숙련된 노동자는 될 수 있겠죠. 하지만 과학자가 되어 새로운 기술을 발견한다거나 경제학자가 돼서 경제난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될 겁니다.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로는 더더욱 성장하지 못하겠죠. 

 건강권과 학습권을 이유로 아동 노동을 금지한 건 포장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이유는 노동시장이 포화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기계(자동화)의 등장으로 일자리가 줄고 있는데 노동시장엔 노동자들이 너무 많았던 겁니다. 처음엔 기계를 부셔볼까(러다이트 운동) 했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기계를 부셔도 공장엔 기계가 자꾸만 늘어났죠. 그래서 ‘지금 노동시장은 포화상태이니 아이들을 먼저 빼자. 건강에도 안 좋고, 공부시키는 게 더 낫지 않겠냐. 근데 아이들이 일을 안 하면 가계 경제가 부담된다. 그러니까 빼는 조건으로 남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자. 그래야 애들 학교도 보내고 밥도 먹일 것 아니냐.’로 합의를 본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후로도 노동시장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배제시켜나갔습니다. 처음엔 어린이, 그다음엔 청소년 그리고 여성까지. 겉으론 인권, 학습권, 가사노동을 내세웠을지 몰라도 실제론 노동시장이 포화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점점 노동시장 안으로 진입하자 인류는 약자부터 노동시장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노동시간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동시장에서 더 이상 내보낼 사람이 없어졌을 때쯤 일반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단축되기 시작한 겁니다. 


 얼마 전 임금피크제 도입 여부를 놓고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임금피크제의 발단은 정년연장이었습니다. 100세 시대에 정년퇴직 나이가 너무 낮다는 주장이 제기된 겁니다. 50대 중후반이면 퇴직해야 하는 부모 세대 입장에서 정년의 나이가 낮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벌어둔 수입으로 남은 50년을 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요즘 같은 시대에 자식에게 기댈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일자리 부족에 시달리는 청년들 입장에선 이 주장이 불쾌했을 겁니다. 가뜩이나 일자리도 없는데 이미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임금피크제는 이런 세대 간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습니다. 정년을 연장하는 대신 일정 연령이 지난 직원의 임금을 깎아 청년을 고용하는 데 쓰겠다는 게 임금피크제의 취지였습니다. 일각에선 기업이 정년에 가까워지는 직원들 임금만 깎고 청년들은 고용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청년들은 임금피크제를 “부모가 자식 일자리 빼앗는 제도”라고 불렀죠. 

 임금피크제 논의는 정년연장 때문에 나타난 것 같지만 사실은 노동시간 단축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입니다. 일자리가 늘고 있는 상황이라면 부모 세대가 정년연장을 요구했어도 무탈하게 넘어갔을 일입니다. 청년들이 “부모가 자식 일자리 뺏는 제도”라며 반발하진 않았겠죠.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는 줄고 있는데 노동시장에선 아무도 나갈 사람이 없으니까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네가 나가라”라면서 말이죠. 


 중국 IT 기업 알리바바 설립자 마윈은 노동시간의 변천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하루 16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리곤 정말 바쁘다고 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그리곤 정말 바쁘다고 하죠.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하루에 3~4시간만 일하게 될 것입니다.” 마윈 회장의 말은 조만간 현실이 될 겁니다. 산업혁명은 늘 노동시간을 줄여왔으니까요. 1차 산업혁명 땐 기계가 2차 산업혁명 땐 컨베이어 벨트가 노동시간을 단축시켰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엔 마윈 회장 말처럼 노동시간이 더 줄어들 것입니다. 4차 산업시대는 자동화 기술이 최고로 발전된 문명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게 임금피크제가 되었든, 최저임금 인상이든, 기본소득이 되었든 말이죠. 새로 생기는 일자리에 비해 기존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출처.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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