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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중력지대 성북 May 28. 2021

빵 드세요

#ESSAY

무소식은ㅡ

무중력지대 성북을 기점으로 사람·커뮤니티·장소 등 주체적 청년 생태계 소식을 담아냅니다.

인지하지 못했던 당연한 것들의 이야기를 조명합니다.

무소식 3호 : ESSAY


영영, 「빵 드세요」


 인생은 뜬금없는 법이다. 

어느 날,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빵을 배우러 갔다. 평생 해본 요리라고는 라면과 핫케이크밖에 없었다. 요리사 옷을 입고 학원의 차갑고 광활한 요리대 앞에 섰을 때 느꼈던 두려움이란. 갑자기 대뜸 빵을 만드는 과정에 던져져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강력분을 퍼 올렸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인간은 빠르게 적응하는 동물이다. 레시피가 하라는 대로만 해도 중간은 가고, 거기에 선생님의 경고와 내 센스가 곁들여지면 어떻게든 완성이 된다. 어느 순간부터 내 천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빵을 매우 잘 만들었다.


 처음엔 신이 났다. 빵이란 모름지기 밥보다 귀하다. 쌀을 물에 불려 밥을 짓는 집은 흔하겠지만 빵을 만드는 집은 드물다. 물론 매일 갓 구운 빵을 식탁 위에 올려두는 집이 있겠지만, 그런 보편적이지 않은 사례는 제치고 생각하자. 오늘 만든 따끈따끈한 빵을 끌어안고 집에 올 때마다 나는 특별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이 꽃길을 보며 오두방정을 떠는 것처럼 빵의 열기를 느끼며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인터넷에서 소년원 제과제빵반 아이들의 재범률이 낮다는 얘기를 읽었었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어떤 피곤하고 자잘한 과정을 거치면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생긴다는 것은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월화수목금요일에 만든 빵이 매일 집에 쌓여가는 것은 절대 신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본디 소화기관이 약하여 빵을 연속적으로 많이 먹으면 위장이 파업을 한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만든 빵은 한 입씩밖에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먹였지만 그것도 일주일, 이 주일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완성된 빵을 비닐 속에 집어넣을 때마다 '이 빵을 어디서 처리하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기쁘게 받아갔던 할머니의 입에서 "안 줘도 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동생도 살이 찐다며 언제 학원을 안 가게 되냐고 질문했다.


 식빵, 옥수수 식빵, 버터톱 식빵, 통밀빵, 호밀빵, 밤 식빵……. 내가 만든 수많은 빵들이 내 곁을 스쳐만 갔다. 슬슬 막막해질 무렵, 나는 빵을 먹고 체해서 약국에 갔다. 이 약국은 항상 체할 때만 간다. 

이쯤 되면 약사님은 내 얼굴만 봐도 '소화제를 사러 왔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갑갑한 위장을 느끼며 약사님과 간단한 스몰토크를 나누었는데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비록 이런 시국(무시무시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역병의 나날)에, 아마추어의 빵이지만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받아주시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용기가 샘솟았다. 마음 한편으로 '빨리 약사님에게 베이글 6개를 처리해버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포장하면 '오늘 만든 신선한 베이글을 선물 드리는 건 어떨까?' 하는 갸륵한 마음으로 퉁칠 수 있는 생각이다. 계산을 마친 나는 주섬주섬 비닐봉지 속에 든 베이글을 꺼냈다.


 "저, 오늘 처음 만든 베이글이라 아직 맛은 못 봤지만……."


 운을 띄우니 약사님은 친절하게 받아주셨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도 빵을 선물할 수 있구나. '내가 단골이니 받아주신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나는 베이글의 절반을 보내버리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나는 또 빵이 너무 많아 곤란해졌다. 항상 열심히 나눠주고 다녀도 매일 처리할 것이 또 생겼다. 동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받아주셨지만, 레슨이 가끔이라 자주 드릴 순 없었고……. 동네 친구인 모 양에게는 학원이 끝날 때마다 '혹시 오늘 시간 있어?'하고 다소 절박한 메시지를 보내곤 성신여대역 근처에서 밀거래하는 사람들처럼 접선하곤 했다. 


 "오늘도 롯데리아 앞에서, 알지?"


 하지만 친구의 품에 빵과 과자를 안겨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 친구도 '살 빼야 하는데.'라는 말을 하기 시작해 더 줄 수 없게 됐다.


 제과제빵의 세계에 대해 하나도 몰랐던 시절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빵과 과자를 나눠주는 학생들이 천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마 현재의 나와 같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나눠주지 않으면 집에 빵 무더기가 생겨 곤란해진다. 이런 검은 속내가 있었겠지. (그래도 만드는 건 힘들다. 만약 누군가 빵이나 과자를 만들어 주었다면 그는 당신을 위해 그 작은 먹거리에 두세 시간을 쏟아부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


 초조한 상태로 집에 돌아오던 나는 우리 집 근처에서 아스팔트 위를 쓸고 있던 할머니를 목격했다. 모르는 할머니였지만, 거의 우리 집 앞까지 쓸고 계셔서 이걸 구실로 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집에 들어가 빵을 포장하고 스티커로 꾸민 후 밖으로 뛰어나갔다.


 "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제과제빵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인데요. 이거 드세요! 오늘 만들었어요."


 나는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 같은 말을 하며 빵을 내밀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내가 준 걸 받으시며 미소 지으셨다. ‘알아~ 이거~’ 같은 미소였다.


 "지난번에 준 빵도 잘 먹었어."


 아무래도 할머니가 동네 친구에게도 전달하셨나 보다. 나는 못 만들어서 모양이 안 예쁘고, 맛이 좀 없을 수도 있고 어쩌고 저쩌고 변명하며 빠르게 퇴장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받아주셔서. 우리 동네 분들의 상냥함에 감동하고 말았다. 한 번쯤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낼 만도 한데, 기뻐하며 받아주시는 게 감사했다. 빵 선물은 즐거운 일이다. 빵과 과자를 만드는 일상은 현재진행형이니, 어서 또 누군가에게 빵을 드리고 싶다.




발행 무중력지대 성북

해당 에세이는 '2021『무소식』생활 수필 원고 모집'을 통해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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