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진 Mar 15. 2022

스포 당해도 재미있다?

내가 사극을 좋아하는 이유

아는 맛이 무섭다!


나는 내가 사극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어렸을  “대하드라마 OO" 류를 많이 보긴 했지만, 그게 취향이었다기보다 그저 부모님 옆에서 어쩌다(?)   같다. 그리고  시절에는 ‘최수종’ ‘유동근 왕으로 나오는 사극은 시청률 70-80% 넘는 국민드라마였기 때문에 어딜 가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엔  채널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용의 눈물>과 <왕건>의 몇몇 씬은 머릿속에 필름처럼 남아있다. 특히 <용의 눈물>에서 원경왕후(최명길)가 태조 이방원(유동근)의 용포를 붙잡고 “정말 너-무 하십니다아~~” 하면 피 토하듯이 울던 장면, 이방원(유동근)이 보내는 차사가 함흥에 도착하는 족족, 이성계(故김무생)가 다 죽이는 장면, 양녕대군(이민우)이 기생들과 매일 먹고 놀며 폐인처럼 지내다 갑자기 정색하며 자신은 왕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두렵다고 말하던 장면 등 몇몇 스틸컷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태조 왕건> 역시 만만치 않다. 아마 이 드라마는 전 국민의 머릿속에 1컷 이상의 스틸컷이 남아있을 것이다.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라는 궁예 대사는 아직도 회자되는 명장면, 명대사니깐 말이다. 그때의 궁예, 김영철은 나에게 아직도, 여전히, 포에버 “궁예 아저씨”로 불리고 있다.


그렇게 국민드라마-사극을 그냥(?) 봐오던 내게, 2014년 <정도전>은 내 취향이 사극임을 인정하게 된 결정적인 인생 드라마다. 당시 나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혹시, 정도전 보세요?”라고 첫마디를 건넸다. 어느 정도냐면 그 당시 드라마 정도전에 빠진 지인들과 모임을 만들어서 매주 주말마다 함께 시청했다. 드라마가 끝나면 독서 토론회 마냥 서로의 의견과 생각들을 마구 쏟아내며 맥주를 들이켰고 각자가 옹호하는 인물의 대변인이 되어 한참을 변호했다. 다음 주에는 어떤 인물이 무슨 대사를 칠 것인지 서로 내기를 했고, 그때 우리 사이에서 유행어는 "인생은 하륜처럼!"이었다.


정몽주(임호)의 선죽교 마지막 장면이 예정돼있던, 그날은 아침부터 카톡이 난리였다. 역사에서는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한 줄이지만 한때 뜻을 같이 했던 정도전(조재현)이 자신의 베프인 정몽주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사부님으로 모시던 사람을 죽여야 했던 이방원(안재모)은 어떤 결심이었을지, 누구보다 포은을 사랑했던 이성계(유동근)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지. 차라리 포은이 함께 조선을 건국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등등 '정도전 패밀리' 멤버들은 하루 종일 인물들에 감정 이입하느라 그날은 아무것도 못하고 오직 드라마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깨달았다.  찐으로 사극을 좋아한다. 결말도, 캐릭터도 이미  국민이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전부 스포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는 결말이라 이상하게  기대됐다.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절대적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역사는 '절대적'이라는 표현과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역사가 좋다. 내가 상상할  있는 구간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무슨 생각이었을까.  마음이 어땠을까' 나는 항상 궁금했다.

 

역사는 단답형이 될 수 없다


역사만큼 인간의 이야기가 섬세하게 담긴 스토리가 있을까? 수많은 인물들의 심리가 얽혀있고 순간순간의 작은 선택들이 누적되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사건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뒤엉켜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때,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 혹은 불쌍한 마음이 씨앗이 되어 결국 그것이 작은 행동으로 피어나는 순간!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지게 되는 것. 역사는 그랬다. 누가 잘못하고 잘했다 보다는 그 당시 상황이 그래서, 분위기가 그래서, 마음이 그래서... 그렇게 돼버린다. 논리로는 설명이 안된다. 그래서 사극에서 이 말이 가장 많이 나오나 보다.


"하늘이 도왔습니다!"


올해 <태종 이방원>이 방영을 시작했다. 사실 방영하기 전에 사극마니아로써 걱정이 많았다. 무엇보다 “궁예 아저씨”를 내가 ‘태조 이성계’로 볼 수 있을까? 드라마 <정도전>에서 ‘하륜’이었던 사람을 ‘정도전’으로 볼 수 있을까? 그 와중에 ‘이지란’은 <정도전> 때와 동일한 배우분(선동혁)이 연기하신다 하여 무척 반갑기도 했고(성니매~ 를 이토록 찰지게 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정도전>에서 한 획을 그었던 '이인임' 인물은 이번 드라마에 전혀 비중이 없어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박영규가 연기한 이인임을 본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조선 건국을 주제로 한 사극은 이미 차고 넘치는데, 과연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질까... 등등 오지랖이 말도 못했다.


(아래부터는 약간에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미 역사 자체가 스포긴 하지만...;;)


하지만 이번 주에 밀린 <태종 이방원>을 몰아 보면서 난 오랜만에 사극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어린 세자를 죽여야 사는 남자, 이방원(주상욱)이 거사를 앞두고 이화상(태항호)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이제부터 괴물이다


이 한마디가 주는 울림이 나에게 너무 컸다. 머릿속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해보면서 결국 스스로 괴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결심하게 된 이방원은 지금까지 피도 눈물도 없게 그려졌던 기존의 이방원과는 완전 다른 인물이다. 그래, 이방원도 사람이다.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면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깐, 그래야 본인이 살 수 있으니깐 그랬겠지. 괴물이란 표현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졌고, 그 한 마디를 시작으로 이방원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 주상욱.. 이방원을 이토록 섹시한 남자로 만들다니, 올해의 대상감이다)


그런 이방원을 돕는 민씨(박진희)는 어떤가.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여자가 갑옷을 입고 역모의 맨 앞에 서있는 장면을 나는 처음 봤다. 누군가는 역사 왜곡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민씨가 왕권 찬탈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이었는지, 얼마나 대단한 자질을 가진 여인이었는지 보여줄 수 있는 적절한 씬이었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극 초반부터 나는 박진희의 연기에 감탄하며 봐왔는데, 이번에 갑옷을 입고 나타난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래!! 입을 자격 충분하지!! 겁나 멋있어 언니!!"


하아.

이제 나에게 남아 있는, 밀린 회차는  2회뿐. 2회를  보고 나면 나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겠지...


그래서 고민 중이다. 이걸 아꼈다 봐야 하나, 지금 봐야 하나. 보고 싶은데 아까워서 못 보겠다!







작가의 이전글 J형 인간이 스트레스받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