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른다는 걸 스스로 아는 사람'에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해서 좋아
내가 출판사 인턴 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시 팀장이자 대선배였던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그 한 마디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내 인생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
내가 어려서부터 가장 부러워했던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주장이 강하고 여러 가지 분야에 박식하며 취향이 또렷한 사람을 보면서 '자기 세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때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반대로 그렇지 못한 나는 자연스럽게 '자기 세계가 없는, 주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누군가 나에게 생각이나 의견 혹은 어떤 정보에 대해 물어볼 때 내가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말은 “음... 잘 모르겠는데”이다. 그 말 밖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내가 너무 답답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어떤 질문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린다. 그랬기에 나는 내가 지식이 부족하고 자기 의견이 없는, 아무리 노력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인턴으로 배우고 일하면서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모습이 너무 좋다'라는 피드백은, 나에게 그야말로 대충격이었다.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네가 모르겠다는 건 지금 여기에 콘셉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다는 거야. 넌 분명할 때 망설임 없이 솔직하게 피드백을 주거든. 모른다, 이상하다, 좋은데요? 뭔가 어색한데요 등등 1차원적이고 즉각적인 너의 반응이 진짜, 리얼 100% 피드백이라는 걸 난 알아. 하얀 도화지 같단 말이지~ 자, 다시 작업해서 한번 더 검토해보는 걸로 하자고.”
그때 그 말을,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녀는 내가 스스로 '무지함'이라고 단정 짓고 숨기며 살았던, 내 평생의 약점을 단숨에 '기회'로 만들었다. 내가 '백지'인 것이 이렇게 자랑스럽고 뿌듯할 때가 있다니!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관점의 차이로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 나는 백지다!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흡수하여
멋진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어설프게 프로 흉내 내는
찐따 같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준비된 순도 100% 아마추어다.
와라. 내 백지 위에 모두 다 올려주마!
그때 이후로 나는 '모르겠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한다. 왜냐하면 내가 모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아니, 믿는다. 내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지식이거나, 사건이거나, 사람이거나, 현상이라면 모르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만약 알아야 했던 걸 놓친 거라면? 이제부터 알면 된다. 알아가겠다는 바르고 겸손한 자세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작든, 크든 내 생각을 표현할 때, 나는 생각을 정리하는 로딩 시간이 긴 편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남편과 다툴 때도, 아이에게 화를 낼 때도, 나는 일단 멈춘다. "잠시만, 생각 좀 하고 다시 얘기하자" 나는 생각 정리의 시간이 조금 느릴 뿐, 생각이 없거나 모자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어디선가 괴로워하고 있을 '백지인간'들이여!
당신이 생각하는 '무지함'이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이 아니라, 알고 보면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일 확률이 매우 높다. 부족하다 생각하는 지금 모습이, 사실은 모든 것의 기회가 되기도 한단 말이다. 어설프게 '척'하는 인간보다 훨씬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게 바로 '백지인간'이다. 그러니 그만 탓하고 그만 움츠러들자. 내가 가진 '백지'라는 황금 같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자.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당신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