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by 유라




햇살 가득한 오전 10시.

변덕스러운 날씨에 패딩과 코트를 번갈아 집기에 바쁜 오랜만의 아침 고민을 안고 시작하는 하루.

가을 햇살 가득한, 아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직 남은 여름도 함께인 날,

가만히 공원에 앉아 햇빛을 오롯이 머금었다.


본래 얼굴 탄다고 유난을 떨며 해를 피해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오랜만에 선사된 날씨에 자신감 있게 태양빛 마구 뿜어대는 해를 맞이해주었다.


참 좋은 날.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는데 때맞추어 달콤한 사랑이 듬뿍 들어간 노래들이 들려온다.

가사 속 남자가 이리도 너를 좋아하니 우리 도망가자고 말한다.


'도망가자'는 말이 왜 사랑이 듬뿍한 노래의 가사에 적절한 지 갑자기 어색한 궁금증이 일었다.

로맨틱한가?



스물한 살, 풋사랑을 하던 그때

나도 남자 친구에게 도망가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철없던 시절, 이 친구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하고 넘겨들었던 그 말이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깊숙이 새겨듣지 않더라도 말이라는 건 마음속에 남겨져 있나 보다. 별다른 의미 없이 들었던 말이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는 그때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기껏해야 스물 중반이 그 말의 무게를 알긴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여자들이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 수는 없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결혼을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무게감이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만한 책임감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을 한평생 단 한 번이라도 마주쳐보고 싶은 거였다.


그렇다면 결혼은 결국 자기 가치에 대한 확인일까...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나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

아무튼 이건 나에 대한 이야기고 나의 생각일 뿐이다.







나는 그래서 '도망가자'는 말이 '결혼하자'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된다.

함께 도망가자니....

그런 무책임하지만 무게감 있는 낭만적인 말이 어디 있겠는가.








도망가자는 말이 로맨틱한 가사였음이 내 머릿속에서 납득이 가자마자

나는 스물한 살, 나와 깊은 풋사랑을 나누었던 그가 크게, 아주 많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호기뿐이긴 했지만 제법 진지했던 그의 말과 내게 해주었던 행동들.

너무 어려 상처뿐인 기억으로밖에 남겨져 있지 않던 그 옛 남자 친구가 처음으로 용서되기 시작했다.




지금 와 돌이켜보니,

일생, 한 번이라도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었던 사람을 만났던 것.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었다는 것.




그래도 로맨틱한 삶을 살았구나 싶었다.







참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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