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지연 Dec 24. 2019

어디에서 살 수 있는가의 문제

어디서 살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어디에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의 의미가 아니라,

 “어디에서 살 수 있는가”와 가까운 것 같다.



부모님께 얹혀있든, 부모님의 노후를 담보하든, 또는 은행에서 대출을 하든, 아예 포기하고 살든, 이미 “집”이라는 공간 자체를 갖기 어려운 시대에서ㅡ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정말 현실과는 동떨어진 꿈같은 이야기, 뜬구름 같은 이야기, 어디 복권에나 당첨되어야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로 여겨진다. 내 집이 아닌 그저 동네나 장소 자체만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살기 좋아 보이는, 살고 싶은 곳들은 역시 ‘평생 이런 곳에는 못 살겠지’ 싶다.



그럼에도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하고, 또 어쩔 수 없이 계속 꿈꾸게 되는 질문이다.

우리는 모두들 머무르든, 흐르든, 잠시든, 오래든.  

그 “어딘가”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도 공간으로부터 매우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고, 평소 공간에 대해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면,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잡을 수 없는 구름에 허공을 젓듯 깊이 울적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뭐 꿈이라도 못 꾸는가!




우리 사회에서 “어디에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디에서 살 수 있는가”와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하면, 일단 집 주변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봄에는 그 어떤 물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연두잎들이, 여름에는 초록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가을에는 빨갛고 노랗게 단풍이 일었다가 어느샌가 낙엽들이 온통 떨어지고 뒹구르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공원이 있었으면 한다. 아스팔트나 벽돌로 넓게 만든 공터가 아니라, 좁고 고불고불한 숲길이 가득하고 중간에 듬성듬성 앉아 쉴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바람에 잎이 솨아아 거리는 걸 들으며 걷다 보면 생각이 없어지는 길, 사랑하는 나의 강아지가 킁킁거리며 냄새 맡고 함께 걸으며 산책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 길 끝에 도서관이나 서점이 있으면 좋겠다. 밤늦게 맥주 한 캔 살 수 있는 상점과,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내려 커피를 파는 까페가 있는, 흔한 프렌차이즈점이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이 주변에 많았으면 좋겠다. 비록 냉담자이지만, 아주 가끔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작은 성당도 가까웠으면 한다. 가끔씩 언제라도 호젓이 먼 거리로 나갈 수 있는 버스도 있었으면 좋겠다. 30-40분 정도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일터가 있었으면 한다. 일개미처럼 바쁘게 일하다가도, 퇴근할 때는 탁 트이는 하늘을 보며 들꽃과 들풀들이 지천에 널려있는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퇴근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아, 여기까지만 상상해봐도 정말 삶의 질이 막 쭉 쭉 올라가는 것 같고 너무 너무 행복하다.




그 길 끝에 도서관이나 서점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나는 퇴근과 동시에 ‘아아아, 제발 혼자 있고 싶어!’를 수백 번 수만 번 외치며,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몸을 밀어 넣는다. 넘어지거나 갑자기 멈추기라도 할지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 같은 경사로와 넘실대는 인파의 에스컬레이터를 두어 번 정도 탄 다음 또 다시 다른 만원 지하철로 갈아탄다. 하나 놓치고 나면 마냥 기다려야 하므로 배차 간격 타이밍은 생명이다.



지하철을 타면 둘 곳 없는 시선은 책이나 핸드폰에 겨우, 겨우 둔다. 지하철을 타는 중요한 팁 중 코 밑에 핸드크림을 바르라는 말을 오늘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짓는다. 오늘은 어쩐 일로 운이 좋아 앉아가나 보다 싶더니, 옆에 앉은 아저씨는 다리를 쫙 쫙 벌리고 밀착 기대어오면 아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나 싶다.



지하철을 다 타고나면 마지막 갈아타는 코스인 대망의 버스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오늘은 좀 앉아 갈 수 있을까 싶은 헛된 희망을 품어본다. 드디어 버스가 오고 앞문으로 사람들이 막 몰리는데, 그 와중에 앞문으로 줄 지어 타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며 버스 뒷문으로 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뒤통수를 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뒷문으로 탄 사람들은 그나마 비었던 자리에 다 앉고, 앞문으로 탄 사람들은 계단까지 서서 가는 걸 보면 욕이 나오려는 걸 꾹 참는다. 그래, 다들 힘드니까. 측은지심으로 마음을 다스리자 싶다가도 ‘인간을 대하는 직업을 가질 것’, 그리고 ‘매일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할 것’. 이 2가지를 충족하면 인간혐오의 길로 이른다는 말에 오늘도 공감하며 진저리가 쳐진다.



어느 날엔가는 무조건 반드시 기필코 ! 필수품인 이어폰을 안 가져오는 바람에, <어디서 살 것인가> 유현준씨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의 ‘청각적인 독립적 공간’도 누리지 못한 채 모든 소음을 들으며 가는 날에는 ‘그래 어디 죽어서 따로 지옥이 아니라 여기가 지옥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보행자 중심이 아닌 ‘자동차 중심의 네트워크’에서 그래, 오늘도 차 없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싶다.


너무나 혼자 있고 싶지만, 너무나 너무나 혼자 있을 수 없는 장소와 공간들을 겨우 겨우 지나오고 견뎌 내고 살아 낸다.




너무나 혼자 있고 싶지만, 너무나 너무나 혼자 있을 수 없는 장소와 공간들을 겨우 겨우 지나 오고 견뎌 내고 살아 낸다.



항상 언제나 늘 생각하는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은 결국에 혼자만의 공간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것은 돈을 지불하고 사적 공간을 사는 것이며, 내 방 외의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구원의 장소인 까페들은 이 역시 돈을 주고 눈치를 덜 받는 공간을 사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꿈의 학교들! 정말 너무 좋았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런 창의적이고 열린 학교에서 배우고 느끼고 중요한 한 시절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너무 아름답고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느껴져서 슬펐다.



근사한 작품 앞에서 덩그러니 앉아 멍도 때리고 책도 보는 미술관들,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건물들과 거리들은 어디 멀리 여행을 가거나 유럽에나 가야만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말에 가는 곳은 역시나 사람으로 넘쳐나고, 그 넘쳐나는 사람들 속에 나 또한 일조한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간 그곳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또 다시 에너지가 소모되고 방전되어버린다. 이게 사는 건가,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하면 위안이 되나, 이것보다 더 못한 곳도 많다 싶은가.



아니, 실은 격렬하게 말하면 “지금에 감사해야지"라는 말도 다 때려치우고 "예전에 이랬어."라는 말도 다 날려버리고 싶고, 그냥 "이거야. 이거면 다 돼."를 찾아 헤매고 또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분에 겨운, 사치스러운, 현실적이지 못한 질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곳이 겨우 겨우 하루살이처럼 견디어내거나, 살 수 있는 곳에 욱여넣어 맞추거나, 그저 살아지거나, 살아내는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머무르든, 흐르든, 잠시든, 오래든 -

그 어디에서든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순간을

기꺼이 누리고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머무르든, 흐르든, 잠시든, 오래든 ㅡ 그 어디에서든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순간을 기꺼이 누리고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만약 우리가 사는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 안에 사는 많은 사람의 건축적 이해와 가치관의 수준이 반영된 것이다. 좋은 도시에 살고 싶은가? 나부터 좋은 가치관을 갖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83p.

*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고 “어디서 살 것인가”를 주제로 썼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로 이어져있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