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으면 다 언니
k장녀로 태어난 나는 언니가 없었다. 기억이 있었을 때부터 나는 내가 바로 “언니”였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못했듯, 언니이기를 선택한 적도 없었지만, 나는 태어나고 몇 년 후 언니가 되었고 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언니, 라는 것은 어떤 존재일까.
언니, 가 된다는 것은 무얼까.
언니, 라 불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친구들과 간혹 장난스레 서로 물어보곤 했다.
ㅡ너는 다시 태어나면 몇째로 태어나고 싶어?
어떤 친구는 외동으로 태어나고 싶다 했고, 또 어떤 애는 자기는 무조건 막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첫째만 아니면 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순서는 상관없고 성별만 다르게 태어나면 모든 게 달라질 것 같다고도 했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공감 가는 말은 역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맞다, 나는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택할 수만 있다면 태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만약에 굳이 태어난다면 막내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막내. 완전 막둥이.
“언니”로서의 나의 가장 어릴 적 단편 기억은 명절날 지하철에서의 장면이다. 이십 대 후반쯤이었을 젊은 우리 엄마는 두 아이를 데리고 혼자 시가로 향한다. 원래가 그랬는지, 명절이어서 그랬는지, 지금처럼 그때도 지하철에는 참 사람이 많다. 와중에 엄마는 바리바리 싸 간 짐도 많았고 한 손으로는 어리고 조그마한 동생의 손을 꽉 잡고 있다. 엄마는 몸은 하나고 손은 두 개뿐이어서 내 손을 잡아줄 손은 없다.
집에서 역까지, 그리고 지하철 계단까지 엄마와 나 사이에는 동생을 가운데에 두고 걷는다. 동생의 손은 전형적인 표현이지만 정말 고사리처럼 작아서, 동생과 내가 손을 함께 잡았다기보다 내가 동생 손을 감싸 잡아주는 느낌이다. 그렇게 걷다가 열차를 기다리면 경적을 울리며 열차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열차 문의 입구는 좁고 사람은 많아서 세 사람이 나란히 들어갈 자리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동생이 손을 잡고 서고, 나는 그 뒤에 혼자 따라 선다.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탈 때, 엄마는 꼭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빠르게 말씀하신다.
“틈. 발 조심!”
그 단호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흠칫 놀란다. 안 그래도 넓게 보이는 컴컴한 틈이 내가 내딛는 순간 확 벌어져 내 발목을 아래쪽으로 끌어 잡아당길 것만 같다. 눈을 크게 뜨고 그 틈새로 빠지지 않게 있는 힘껏 발을 벌려 탄다. 타는 데 성공하고, 내 뒤로 문이 닫히면 안도감이 든다. 열차는 지하로도 갔다가, 지상으로도 나간다. 운이 좋으면 앉아 가기도 하고 그렇게 사람 구경도 하고 너른 풍경도 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내릴 때가 된다.
문제는 탈 때가 아니라 내릴 때이다.
엄마는 역시 한 손으론 동생 손을, 한 손으론 짐을 들고 열차 입구 앞에 마라톤 출발선에 선 느낌으로 치고 나갈 준비를 하신다. 문이 열리는 순간, 빠르게 뒤를 돌아보시며 “틈. 발 조심!”하고 성큼 내린다.
아 맞다, 발 조심!
검은 틈새를 보며 발이 빠지지 않게 다시 한번 힘껏 발을 벌려 내리고, 그 사이에 나보다 크고 나보다 빠르고 나보다 많은 사람들이 틈새만큼 검은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린다. 동생과 먼저 내린 엄마는 검은 사람들 속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내 눈은 엄마를 쫒기에 바쁘다.
나는 내가 3살일 때도, 유치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초등학교 1학년일 때도, 중학생일 때도, 고등학생일 때도, 대학생일 때도, 그리고 지금도, 항상, 앞으로도 영원히, 늘 언니였다.
나는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는 아기였던 적이 없고, 나는 어린아이였던 적이 없다. 그래선 안 되었다. 징징댄 적이 없고 응석을 부려본 적이 없는 아이.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아야 하고,
조금은 더 잘해야 하고,
조금은 더 잘 참아야 한다.
모부에게는 조금 손이 덜 가게 혼자서도 알아서 잘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동생과 사이좋게 잘 지내거나 동생을 잘 돌볼 줄 알아야 하고, 가끔은 부모님의 힘듦을 눈치껏 도와드리고, 감정을 들어드리거나, 위로해드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달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큰 애로서 받고 있는 혜택을 긍휼히 여겨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집안 사정이나 어른들의 입장도 내 힘껏 헤아릴 줄 알아야 하며, 그렇게 이해한 것으로 다시 동생에게 나름 알려주거나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첫째로 태어난 인간이니까. 나는 언니니까.
언니여서 물론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동생보다 말의 힘이 있고
나는 동생보다 믿음을 받으며 무엇보다
나는 동생보다 부모로부터 무엇보다 가장 처음의, 날 것의, 그래서 어쩌면 서투르면서도 오롯했을,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동생보다 모조건 늘 부모님과 함께 산 생애가 몇 년 더 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내가 차고 넘치게 더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부모로부터 처음의 무한한 사랑과 그만큼 받은 것에 대한 책임감이 부여되지 않는, 그래서 조금은 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쉽게 유연해지고 더 유쾌한 사람이고 싶었다.
어떤 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묶인 원심력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들로 마음껏 아무렇게나 튕겨져 나가고 싶었다. 말도 안 되게 어린아이처럼 징징대고 어리광을 부리다 엉엉 울어보고도 싶었다. 응석을 부려도 오구오구 괜찮아, 귀엽게 받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내가 언니인 게 아니라 나에게 언니, 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혹시 안 하거나 못 하더라도 언니가 하겠지? 의 그 언니. 모르는 건 언니한테 물어보지 뭐, 의 그 언니. 무서우면 그 등 뒤에 숨거나 좀 모른 척해도 될 그 언니. 언니가 하는 건 다 좋아 보이고 괜찮아 보이고, 그래서 그냥 어떤 건 고민하지 않고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할 그런 언니.
어쩌면 가지지 못한 것, 해보지 못한 것, 받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중간은 중간으로, 막내들은 막내들로서의 설움과 고난과 어려움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냥 인터뷰 내용도 너무 좋고 인터뷰어도 인터뷰이도 멋있는 사람들로 가득 가득한 ‘멋있으면 다 언니’라는 책을 재밌게 읽고서 책 제목만 보고 갑자기 말하고 싶어 졌다.
멋있으면 언니고 동생이고 오빠고 누나고 막내고 뭐고 나발이고 상관없다고.
그냥 멋있는 한 ‘사람’이라고.
언니 말고 그냥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고.
언니라는 역할 기대, 언니라는 말, 좀 지긋지긋해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타자화된 언니들은 물론 늘 멋있을 때가 많지만,
스스로인 내가 누군가의 언니라고 하여
꼭 멋있지는 않아도 된다고.
책 <멋있으면 다 언니>를 읽고 언니에 관하여 썼습니다.
글 성지연 / 그림 ©Qwa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