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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연 Aug 21. 2019

취중 그림


출퇴근 길 발걸음은 터덜터덜했다. 저녁을 해 먹고 다음 날 준비를 해야 되니 퇴근길 발걸음도 가볍지 않았다. 주말에는 눈뜨는 것조차 싫었다. 내가 원해서 지구 반대편까지 와 놓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자책했다.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업무를 하느라 숨이 막혔다. 제일 예쁜 시기인 조카가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놓치는 것도 서러웠고, 척척박사인 언니가 옆에 없으니 혼자 모든 정보를 찾아 해결해나가는 것도 힘에 부쳤다. 세제인 줄 알고 세탁기에 넣었던 액체가 락스여서 아끼던 옷 대부분을 버려야 했다. 사람들이 자꾸 휴대폰과 가방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줘서 없던 겁도 생겨났다. 혼자 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 던진 물병에 물세례를 받았다. 생각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물가는 비쌌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내가 외로움의 뜻을 온몸으로 느꼈고, 성인이 다 되어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처음으로 심리 상담도 받아 봤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 접고 한국에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돌아가더라도 아르헨티나를 좋아하다 돌아가고 싶었다. 





지쳐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일러스트레이터 모임에도 나갔다.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을 보며 인사 연습을 해도 도착하자마자 얼어붙었다. 내가 이 모임에 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고, 초면인 사람에게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를 몰랐다. 모임에 도착해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그림만 그리다 집에 돌아와서, 자기 전까지 후회하곤 했다. 


한 모임에서 일러스트레이터인 호세피나를 만났고 같은 방향이라며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호세피나를 더 알아가고 싶었는데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없던 용기를 짜내어 차를 같이 마시자고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 버렸다) 회사에서 호세피나는 원래 회사원이었다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직업을 바꾼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 다니며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냐 물어보니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 전에 그림을 그리고, 회사 점심시간에도 그리고, 퇴근 후에는 화가 친구와 만나 함께 그렸다고 한다. 나는 절대 아침형 인간이 아니니 새벽 그림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며 점심 시간에 그림을 그려 보기로 했다. 회사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근처 카페로 가서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울면서 꾸역꾸역 그린 날도 있었고, 그릴 때만큼은 다 잊고 흥얼거리며 그린 날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좋아하기 위해, 괜찮아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카페와 서점, 와인바를 찾아가서 와인을 시켜놓고 그림을 그렸다. 점심시간, 퇴근 후, 주말에 조금씩 그렸다. 그러다 보니 도시의 공간을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고, 나도 이 도시의 구성원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또 취중 그림은 언제나 내 기분을 업그레이드해주었다. 


힙하고 트렌디한 공간도 좋지만 100년이 넘는 긴 역사와 전통이 있는 카페가 특히 좋았다. 인테리어의 무질서함과 일관성의 결여, 그 속에서 우러 나오는 운치가 있었다. 오래된 카페의 창문을 사랑했다. 카페에 들어서면 어느 쪽 창가에 앉을지 왔다 갔다 고민하며 여러 번 자리를 옮겨 다녔다. 밤이 되면 조명과 인테리어의 조합이 어우러져 꼭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스카프와 트렌치코트로 멋지게 차려입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애프터눈 티와 다과를 즐기고, 대화하며 깔깔대는 모습이 어떤 풍경보다도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와인을 홀짝홀짝하며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면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취하고, 들키기라도 할까 봐 급하게 스케치를 했다. 


커피를 못 마시는 나는 어딜 가나 와인을 시켰다. 물을 따로 시켜야 하니 돈을 좀 더 추가해서 와인을 마신 것도 있다. 하루는 지인과 카페에 갔는데 내가 점심시간에 와인을 주문하니 깜짝 놀랐다. 와인 한 잔 마시고 오후 근무를 해보면, 앞으로 점심때마다 와인을 찾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와인은 에티켓과 배경지식을 갖춰야만 할 것 같아서 아르헨티나에서 살기 전에는 자주 마시질 않았다. 와인이 유명한 아르헨티나에 있으니 문화 체험하듯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막 사서 마셔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또 격식과 상관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나도 편하고 쉽게 마셨다. 와인 문외한임은 딱히 변한 게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와인을 며칠 안 마시면 뭔가 허전한 단계까지 도달했다. 


내가 본 대부분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오지랖이 넓고, 어떻게 보면 그 누구와도 대화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한 와인바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소믈리에 아저씨는 뭘 그리는지 기웃기웃 쳐다보며, 그림을 선물로 주고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그림을 재빨리 완성해서 드리니 와인 한 잔을 서비스로 주다가 아예 병째 선물로 줬다. 나만 알고 싶은 조그만 동네 바에서 소믈리에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며 추천 와인을 마시고 그림을 그린 날들 때문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힘이 생겼고, 그러다가 진짜로 아르헨티나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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