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영 Dec 24. 2022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천장에서는 물이 쏟아지던 날

어둡고 좁은 골목길이 새하얗게 변한 아침이면, 나는 학교 가는 길이 놀이동산 가는 길처럼 설레었다. 골목길을 내려가며 눈을 밟는 그 보드득한 느낌이 좋았다. 층계참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뒷걸음으로 서너 발짝을 올라가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개같이 눈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6차선 43번 국도길이 새하얗게 변한 아침이면, 나는 학교 가는 길이 지옥 가는 길처럼 무섭다. 영하 40도 체감온도에 얼어붙은 벨로스터의 문짝을 겨우 열고 한참을 부릉 하며 공회전한다. 덜덜거리는 엔진음에 스노우 타이어로 눈을 밟는 그 느낌이 불안하다. 그렇게 나이 들어 개 같지 않게 눈을 싫어하게 되었다.


학교 주차장에 벨로스터를 진정시키고 와이퍼를 세워놓는다. 야근하는 것도 우울한데 벨로스터 앞 유리에 하얗게 눈이 덮이기라도 하면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커버를 씌운다. 어느새 새하얗게 단장한 학교 건물이 점점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다. 그 모습이 역겨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학교 안에 거미줄처럼 얼키설키 꼬인 배관 중에 어느 것 하나가 돌아서려는 내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협박한다. ‘너 그냥 가면 나 터져버릴 거야’라고…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그가 터지면 예쁜 여학생들이 입김을 내뿜으며 수업을 받아야 할 수도, 화장실이 얼어 물이 내려가지 않을 수도, 물난리가 날 수도 있다. 꼭 그놈이 아니더라도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옥외 조형물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그래, 가자! 지옥으로…


그러나 지옥에도 지원군은 있었다. 걱정을 안고 학교 안으로 가는데 통행로에 눈이 다 치워져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부지런한 당직 기사님과 시설주무관님이 미리 다 치워놓은 모양이다. 걱정 하나 덜고 사무실 문을 여니 90년대생 주무관이 웃으면서 크리스마스 느낌의 음악을 틀어놓고 있다. 그녀의 미소 뒤로 커피 향이 날아와 내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숫자를 쑤셔 넣는다.


숫자와 서류를 정리하며 키보드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데,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나는 당직실로 뛰어가 화재경보 수신기 뚜껑을 열어젖히고 수신기가 알려주는 위치를 파악했다. 중학교 본동 건물 3층이었다. “중학교 3층이요” 하고 실장님과 주무관에게 소리쳤다. 3층을 향해 뛰어가는 내 짝짝이 신발이 보였다. 아마 경보에 놀라 허둥지둥하며 실내화와 운동화를 발에 들어가는 대로 그냥 신고 나온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다. 일단 뛰어야 한다.


다행히 불이 난 곳은 없었다. 학생들이 축제 이벤트로 꾸민 귀신의 집에 연기를 피워 경보기가 울린 것이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주의를 주고 사무실로 내려오는 실장님과 주무관은 축제로 즐거워하는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반색했다.


나는 다시 각 잡고 책상에 앉아 놀란 마음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또 숫자를 집어넣었다. 충혈된 눈은 또 어떤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한 채 계산기와 서류를 오가며 희번덕거렸다.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웬 남자가 “천정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어요. 얼른 나와보세요”하고 소리쳤다. 아직 짝짝이 신발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복도로 뛰어나갔다. 현관문 밖으로 하늘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고, 머리 위 천장에서는 차가운 물이 여기저기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급한 나머지 조퇴한 시설주무관님에게 전화했다. “학교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어! 현관문 바로 옆에 화재경보기 위야~ 어떻게 해” 시설 주무관님은 근처에서 볼일을 보다가 학교로 달려왔다. 점점 차는 물을 아침에 눈 치우던 넉가래로 퍼냈다. 나의 짝짝이 신발은 물을 먹어 점점 무거워지고 바지는 물방울로 채워진 밑단을 흔들어댔다.


시설주무관님이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어디선가 직원들이 달려들어 눈에 보이는 일들을 처리했다. 허리가 아프다던 계장님은 갑자기 원더우먼이라도 된 듯 교구택배 상자들을 창고로 옮겼다. 카프스킨 구두에 와이드 슬랙스를 입고 있던 실장님은 장화에 몽빼바지 차림인 양 물을 퍼냈다. 행정실직원들은 마치 이런 일을 훈련받은 전문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나가던 교장선생님이 같이 물을 퍼 나르자, 선생님들도 물퍼내기를 도왔다. 한 시간 넘게 수침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무슨 약이라도 마신 듯 집중했다. 물을 퍼내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설주무관과 옆자리 주무관이 수침의 원인을 알아내고, 소방 배관을 잠그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가 된 느낌이었다. 누구의 지시도, 의지도, 계획도 아닌 본능으로 움직이는 다람쥐 말이다. 


수침이 멈추고, 모든 물을 퍼내고, 주변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었다. 짝짝이 신발에 맨발로 집에 돌아오니 어인 일로 남편이 집에 와 있었다. 맨발을 보고 귀여운 호들갑을 부리며, 그가 뽀송한 양말을 나에게 건넸다. 탁텔사의 부드러운 수면양말이 차갑고 축축한 내 발을 감싸는 순간, 발가락 끝이 그 느낌을 기억해냈다. 눈을 밟는 그 보드득한 느낌이 좋아서, 층계참을 내려가는 게 아쉬웠던 그 시절. 개같이 눈을 좋아하던 그 느낌말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역시 글쓰기다 라며, 이 글을 쓰고 막 퇴고하려던 참이었다. 눈과 물에 대한 글의 현장감을 위해서 일까. 가득채운 20리터 가습기를 쏟아 거실이 물바다가 되었다. 또다시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가 되어 쏟은 물을 정리했다. 실내화가 축축해지면서 다시 개같이 눈을 좋아하던 그 느낌을 느 낄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2월 대목, 행정실 주무관의 거뭇한 눈밑을 보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