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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Dec 17. 2022

12월 대목, 행정실 주무관의 거뭇한 눈밑을 보라.

십오 년 전부터 나는 숫자를 다루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숫자라는 놈은 나와 맞지 않는 기묘한 문자체계였다. 그런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계산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된 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그게 뭐든 간에 그건 다 예정되어 있던 거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부터였으리라. 인도인이 0에서 9에 이르는 열 개의 기호를 처음 알아낸 그때부터였으리라. 


이 일은 신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나 같은 인간이 애초에 공무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만큼 나는 자격 없는 사람이었다. 숫자를 문자로 받아들일 그 자격 말이다. 그만큼 나는 숫자에 약했고, 숫자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선물처럼 받은 이 일을 하며, 나는 그 숫자를 믿게 되었다. 신을 믿듯이…


내가 믿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오늘도 선생님들에게 메신저 폭탄을 던진다. 

“선생님 품의서 금액보다 영수증 금액이 더 많네요”
“선생님 00사업 집행률이 30% 미만이네요”
“선생님 군청 보조금에 자부담 비율까지 맞춰서 집행하세요”


나는 숫자를 쳐다보고, 선생님들은 창밖에 내리는 흰 눈을 바라본다. 곧 겨울 방학이 되면 그들은 연수라는 명목으로 쉬게 된다. 쉬지 않는, 아니지, 쉴 수 없는 내 귀를 찢고 소리가 들린다. 나보다 10년은 늦게 임용된 그의 통장에  내 숫자의 점오배가 찍히는 그 소리 말이다. 나는 배알꼴림을  아로새겨 몇 개의 메시지를 더 보낸다. 


그렇게 나는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처럼 되어 버린다.

“선생님 발전기금은 이월하면 안 되세요, 장학생 추천을 서두르세요”
“선생님 그 예산은 교당경비 3%까지 맞추셔야 됩니다”
“선생님 강사수당 지급기준에 의한 단가를 확인해주세요”


12월이 되면 아이들과 선생님은 방학을 기다린다. 나는 12월이 되면 새로운 숫자를 기다린다. 그들은 방학 때 무엇을 하며 보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나는 새로운 예산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고민을 한다. 그들은 올 한 해 어떤 사업을 했는지 성과를 정리하고, 나는 숫자를 정리한다.


액셀에 학교의 전체 예산을 펼쳐놓고 함수를 걸어본다. 검은 호랑이 해의 사업별 집행률을 따져서 남은 돈을 박박 긁어낼 준비를 하려는 그 참에… 선생님들은 검은 호랑이가 가기 전에, 내가 돈을 박박 긁어내기 전에, 집행률을 올리기 위해 그간 미루었던 예산을 한꺼번에 사용한다. 


며칠 만에 택배 박스의 노오란 줄이 현관 앞까지 이어진다. 그야말로 12월 대목이 왔다. 낮에는 밀려오는 주문을 시스템에 입력한다. 밤에는 마지막 떨이까지 팔기위한 장사꾼처럼 남은 돈을 박박 긁어낸다. 내가 야근까지 하며 그렇게 돈을 끌어 모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목마른 사슴들이 살려달라는 눈빛을 나에게 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판에 돈이 모자라는 사업부서에 숫자를 쏴서 그들을 살려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결산 및 추경 작업을 하고 나면 눈밑이 점점 거뭇해진다. 


12월 대목, 행정실 주무관인 나는 거뭇한 눈밑을 감추지 못한 채 교무실로 향한다. 선생님들의 수기 초과근무 대장을 가지러 가기 위함이다. 나의 거뭇한 눈밑을 본 교무부장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다. 그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나를 반긴다.


“아이고~ 우리 대00여자고등학교 00주무관님~ 오셨네요. 아니 12월이 되니 눈밑이 거뭇 해지셨어. 비타민 부족이야. 내가 유자차 진하게 타드릴게”
“부장님이 이렇게 알아주시니 힘이 나네요”
“아니 교감선생님은 나중에 00주무관 얼굴 어떻게 보려고 책상에 가만 앉아 계세요.”

젊은 시절 꽤나 잘생겼을 것 같은 교감선생님이 슬쩍 일어나, 다가온다. 그에게 딸이 있다면 아주 미인일 거다. 백퍼센트의 확률로.

“아쿠 그러니까, 내가 잠깐 피곤해서 판단력이 흐려졌어. 00주무관님이 이곳까지 납시셨는데 무슨 배짱으로 책상에 가만 앉아있던 거야,”


이 두 분의 귀여운? 호들갑에 그간 나를 흔들었던 90년대생 선생들의 4가지 없는 행동들이 사르르 잊힌다.  어찌 이 두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답례로 나도 귀여운 호들갑을 떨어본다.

“부장님이 타 주신 유자차를 마시니 힘이 번쩍 나네요. 남은 힘으로 교육경비 정산할 때 제가 도와드릴게요”
“교감선생님 바쁘신데 행정실 주무관이 뭐라고 이렇게 환대를 해주셔요.  허리 안 좋으시다던데 추경 때 모션 데스크 하나 사드려야겠네요” 


12월이 지나면 거뭇한 눈빛이 제 빛을 찾겠지

나의 베알꼴림도 풀리겠지

조카같은 90년대생 선생들도 귀여워보이겠지

그러다가 야근이 없는 작은 학교로 가겠지

그렇게 몇 바퀴돌다가 이놈의 숫자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러면 그때는 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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