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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Jan 28. 2023

연말정산에 하는 관계정산

연말정산 때 1년 동안 너와 나의 관계도 정산하자


나는 자칭 프로일잘러다.

“노션을 사용하면 누구나 프로 일잘러가 될 수 있다”
슬기로운 노션활용법 中



슬기로운 노션활용법을 익히고, 강의를 들으며, 나는 '프로'라는 정체성을 찾았다. 이전에는 공무원법에 따른 성실의무를 지켰으나, 이제는 돈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돈 앞에 성실해야만 하고, 게다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스스로 프로라는 옷을 입고 나선, 감정을 빼고 일한다. 프로니까, 아마추어처럼 얼굴 붉히고, 쌍심지 세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언영색으로 장식하지도 않는다. 몇 년 전 ‘인간관계가 이렇게나 힘든 건가’ 하며 남몰래 화장실에서 질질 눈물을 짜내던 (-타고난 관심종자 ESFJ 특유의 냄새를 풍기고 싸돌아 다니다가 뒤통수 맞고 뒷목 잡고 쓰러지던-) 그때의 유리멘탈 주무관이 더 이상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나도 1년에 딱 한번, 감정을 실어서 일할 때가 있다. 바로 13월의 월급날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연말정산 때이다.


연말정산은 근로자가 1년 동안 낸 간이소득세(-대락 추정해서 적당히 메기는 세금-)를 진짜로 다시 계산하여 간이소득세를 더 냈으면 돌려받고, 덜 냈으면 토해내는 정산의 개념이다. 이름이 연말정산이라고 해서 연말에 하는 건 아니다. 1월 1일~12월 31일까지의 365일이 모두 지난 다음 해, 1월쯤 정산한다.


학교의 경우 보통 1월 말에 하고, 해당 정산금(-더 냈으면 돌려받고, 덜 냈으면 토해내는-)은 2월 급여에 반영한다. 방학 때 출근하지 않는 교직원들도 이때만은 꾸안꾸 패션의 정석인 캡모자에 츄리닝 차림으로 행정실에 서류를 제출한다. 담당자인 나는 연말정산을 하며 그들과의 관계정산도 한다.


 산산이 흩어져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관계정산

꾸안꾸 패션도 힘든 경우 우편물로 보내거나 심지어 5월에 따로 세무서에 가서 직접 연말정산을 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들과의 관계정산은 없다. 그 사람과의 감정은 엔트로피 증가로 이어진다. 정산조차 거부당한 내 감정은 산산이 흩어져 어디론가로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 듯 보이지만 내 무의식 깊은 곳에 먼지처럼 앉아있을 수도…



세금 토해낼 때, 욕지기로 게워내는 관계정산

 나 보기가 역겨워 행정실에 가급적 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세금정산 때문에, 나는 관계정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된다. 나를 힘들게 한 5%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행정실로 들어온다. 나는 나대로 아버지에게 강제로 주입된 인사예절로 인해 차마 그를 외면하지 못해서, 의자를 뒤로 밀고 몸을 젖혀 모니터 뒤로 숨는다. 모니터 너머로 그가 보이지 않아서 인사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깊이 업무에 집중한 척을 하며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더불어 모니터 뒤에 숨어 있는 내 감정이 떠드는 소리를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기계식 키보드를 평소보다 세게 두들긴다.


모니터 위로 슬쩍 서류가 다가오고, 뒤로 나만큼이나 역겨운 그의 얼굴이 보이면, 나는 더이상 토해낼 것이 없는데도 헛구역질 하듯 허공에 대고 짧게 욕지기를 한다. “서류함에 두고 가세요”



13월의 월급 받을 때, 더 주고 싶은 관계정산

또 다른 모양의 관계정산도 있다. 1년간 나를 기쁘게 했던 20% 사람들이 함박꽃처럼 몰려온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진심 어린 미소로, 평소대로 행정실로 찾아온다. 나는 아버지에게 강제로 주입된 인사예절에, ESFJ 추임새를 넣고, 연극성 성격 박자를 맞춰, 영혼을 끌어 호들갑을 떤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손끝을 나뭇잎 모양으로 만들어 바람에 흔들리듯 손인사부터 시작하고, 파티션을 재빠르게 밀치고 두 손으로 그의 서류를 받는다.


그와 나란히 회의용 탁자에 앉아 달달한 믹스커피 향에 에워싸여 서류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면 5월에 세무서를 또 가야 해. 전에 다니던 회사 어디시라고요? 내가 전화해 줄게

“약 드시는 거 있다면서요. 장애인공제 혜택용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어요. 내가 알아봐 줄게

 “해외여행 간다고. 걱정하지마. 인증서 주고 가세요. 우리 사이에 무슨~내가 다해줄게




1년에 딱 한번 편파적이고, 감정적이 되는 이 기간.

곧 3월이 되면 헤어지는 우리는 악연 또는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 고리는 내가 선택하고 내가 만든 것이다. 내가 오해하고 싶어 오해를 만들고, 내가 좋아하고 싶어 이해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연말정산도, 관계정산도 아닌. 나라는 인간의 선택을 정산하고 있는 건가.


내년의 연말정산 때는 조금이라도 덜 편파적이고 덜 감정적이 될까. 말까. 지금은 그저 진정한 프로일잘러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길목에서 잠깐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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