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마음으로 과감하게
4년 차 디자이너 문턱을 코앞에 두고 햇병아리 기획자의 길로 새로이 들어섰다. 내 나이 서른에 벌어진 이슈였다.
어릴 적부터 줄곧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년 시절부터 요목조목 무언갈 꾸미거나 그림 그리는 일을 유독 좋아했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선 캐릭터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작은 공책에 날마다 상상 속의 캐릭터들을 그리고는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제법 뜬금없지만 어쩌면 가장 목표치에 근사했을, 명확한 꿈의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사실 타고나길 천재적인 예술 감각이나 센스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공부 머리가 있는 편도 아니라서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일반 인문계고에 진학한 후, 고등학교 3학년, 1년간 함께 병행할 모 직업학교 패션디자인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추가로 합격해 하루는 인문계고, 나머지 4일은 직업학교로 등하교를 하며 일반 고등 교육 과정과 그토록 원했던 패디 실무 공부, 그리고 자격증 공부를 겸했다.
인문계고와 직업학교 두 곳을 번갈아 다니다 보니, 몸이 남아나지 않는 게 몸소 종종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이러한 결정을 후회하는 때도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중도 포기는 없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요하게 졸업장까지 따냈다. 그렇게 한 길 우물의 초입, 조그만 웅덩이 정도는 파낸 것 같았다.
가던 길 그대로 우직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승진도 머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직급에 욕심은 크게 없는 편인데, 그렇다고 만년 사원이나 일평생 막내인 양 일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열심히 이대로만 하다 보면, 언젠가 주임이나 대리 직급 정도는 달지 않을까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른 미래 상상도 소소하게 해봤다.
그리고 어느새 나이 서른이 되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줄곧 지켜온 경력을 유지해야 할지, 새롭게 하고 싶은 것에 다시 도전을 할지, 깊은 고민의 기로에 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며 산 세월이었음에도 정작 내가 서른이 되니 이렇게 고민스러울 수가 없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외쳤지만, 은연 중에는 결국 편협한 고정관념을 스스로 깨지 못하고 산 것이었다. 심지어 그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도전은 결국, 시작으로부터 함께 한다.
코앞에 고지를 두고 이룬 모든 것을 무른다는 일은 정말 무모한 짓이 맞았다. 그래서 더욱 고민은 길 수밖에 없었고, 그 끝에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과감하게, 경로를 틀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이 일은 처음이 맞는데, 이미 4년 차에 진입한 경력직 직장인은 그간 쌓은 직무 스킬과 증명된 조직 적응력을 인정받고 싶다.
처음 하는 일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만들어 놓은 연봉선을 깎아 먹고 들어가는 건 싫었다.
물론 그만큼 책임져야 할 것도 많을 것이고, 증명해 보여야 할 성과 수준도 높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크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보기 보다 나는 일 욕심이 꽤 큰 사람이었고,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가장 유리하게 빛나는 '자신감'을 발굴해, 취업 시장에 내놓았다. 그간의 경험과 경력은 유리한 바탕이 될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디자이너에서 기획자로 성공적인 직무 변경을 이루었다. 직급은 사원으로 유지하되, 연봉은 기존보다 700 정도를 더 올려서 가게 되었다.
막상 부딪쳐 보니, 못 오를 산도 아니었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결국 정상을 보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
잘할 수 있을까?
잘 될까?
후회하진 않을까?
무수한 고민과 생각을 거쳤다. 하지만 그 모든 고민과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생각보다 세상은 더 넓었다.
항상 익숙하게 가던 길, 조금 다른 길로 샜다고 큰일나는 일은 없다. 가려는 목적지에 닿기까지 시간은 조금 더 걸릴 수 있어도, 어디든 길은 이어져 있다.
따라서 결국, 어느 곳이든 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이 듦'에 인색한 시선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앞으로 세상은 더 유연한 시선을 갖추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분명 세상은 변하고 있고, 그 안에서 사는 '나'의 존재는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기도 잘 헤매지만 나름대로 잘 머물고 살고,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