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를 써 주면 생각해볼게요."
"오호.. invitation을 써달라는 말이지? 나는 너처럼 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하는데... 글씨 못써도 되는 거죠?"
"마음만 잘 전달되면 글자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래? 그럼 내가 잘 써볼게."
유난을 떠는 일엔 누구보다 우선인 그가 요즘 몰두해 있는 과제는 본인의 집에 나를 초대하는 것이다. 처음엔 작고 불편한 집엔 초대할 수 없다면서 몸을 사리더니, 결국은 이사라는 큰 일을 감행하고야 말았다. 나와 같이 조금 더 넓고 편한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여자 친구가 본인의 집에서 조금 더 편하게 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사를 하다니. 이게 이사까지 해야 할 일이냐고 의아해하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서로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조금 더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나는 너의 단단한 울타리를 좀 파고들고 싶거든."
하지만 남의 공간을 편하게 드나드는 일이 불편한 나는, 아무래도 싫은 마음이 들었다. 걱정이 되었다. 요즘 기어이 틈을 파고들어 내 공간에서 주말을 보내곤 하는 그가 아직은 불편했다. 그런 나의 불편한 마음을 주말이 지나면 혼자 있게 된다는 기대로 꾹꾹 누르는 단계였다. 아직 그곳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내 마음에게 또 다른 과제를 던지는 그 사람이 조금 밉기까지 했다.
그를 조금 더 고민하게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리고 손편지라는 대안을 내밀었다.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를 건네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다.
주말, 내가 일하고 있는 사이 그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일하는 내내 나는 낯선 동네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잔뜩 걱정이 되었다. 끝나자마자 서둘러 긴장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한 통에 바로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는 왠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였다.
작은 편지봉투가 달린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면서, 그가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아무런 날도 아닌 날에 받는 꽃다발이 좋다고. 그래서. 나 잘 기억하지?"
"아니 어떻게 이걸 샀어요? 편지는 뭐예요?"
"오랜만에 대학로를 산책하다가 꽃집을 발견했어. 꽃집에서 꽃을 골랐지. 주인이 방금 출근한 것 같더라. 아마도 내가 첫 손님이었을걸. 카페도 겸하는 공간이었어. 꽃을 고르고 커피 대신에 다른 음료를 주문하려고 보니까 라벤더 차가 있었어. 그래서 그걸 주문했지. 근데 너무 우려서 조금 쓴 맛이 됐어. 거기서 꽃을 사면서 편지를 쓰려고 카드 3장을 샀는데, 3장을 다 실패한 거야. 그래서 편의점에 가서 편지지 세트를 샀어. 6장의 편지지가 있었는데 이거마저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몰라. 이건 6장의 편지지 중에 마지막 장이야. 진짜 겨우 성공했어."
"엄청났네..."
"초대장이야. 약속한."
널 만나기 전 늘 설레였습니다.
여행기를 읽을 때마다
항공권을 찾을 때마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설 때마다.
이제 너 때문에 설레입니다.
네가 보낸 메세지를 볼 때마다
네 사진을 볼 때마다
그리고 너를 만나러 갈 때마다
너와 함께 있으면 늘 행복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그런 너를 내 공간으로 초대합니다.
내 공간에서 그리고 네 공간에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근히 귀여운 필체로 가득한, 말마따나 아마도 9장의 종이 중 마지막 장이었을 그 편지를 보고 가슴이 욱신 거렸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이 가득이었다.
꽃집에 있는 모든 꽃을 하나씩 다 가져온 것 같은 풍성한 꽃다발도 너무 사랑이었다. 너무 강한 장미향은 싫어하고 시트러스 향을 좋아한대요.라고 설명했는데 꽃집 주인이 시트러스 향이 뭔지 모르더라 하는 뒷 이야기도 즐거웠다. 향기 가득한 그 꽃다발을 일주일 내내 살펴보고 향기 맡았다. 꽃망울이 활짝 핀 꽃이 될 때까지 어르고 달래면서 사랑을 주고받았다.
나는 꽃보다 네가 더 이뻐. 하는 간지러운 그의 말은 귓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봉우리가 피어나는 이 꽃들이 제일 예쁜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가 마음으로 고르고 골랐을 꽃들이 충분히 활짝 피어 제 역할을 다 할 때까지 아끼고 또 아껴주었다. 이런 큰 꽃다발을 언제 또 받겠어 하는 간질거리는 마음을 담아서.
이런 것을 받고 거절할 수는 없어서, 이사가 막 끝난 그의 집으로 갔다.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을, 빽빽한 건물들이 가득한 반듯한 계획도시로 향했다. 낯설음이 온 몸을 휘어감았다. 이렇게 천천히 한바퀴를 돌면 다시 집이야, 이 길은 산책길로 향해, 이 길을 걸어가면 큰 공원이 나와, 하는 그의 말을 아무리 들어도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얼른 낡은 건물이 가득한 내 동네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은, 비밀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