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갈 때 전화해요."
"응 알겠어요-"
조금 늦어진 외출 길을 걱정하면서 그가 당부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약속 장소에서 버스를 타고 작업실을 들렀다가 작업실에서 다시 차를 몰아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작업실에서 출발할 때 전화하라는 말인가 보다 하고 지레짐작해버렸다. 어디서 출발할 때 연락하면 좋은지 미리 더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는데.
버스를 타고 작업실로 가는 도중에 문자가 왔다.
-막차는 탈 수 있어?
-오잉, 작업실 근처 도착했찌요.
-출발할 때 전화하라니까
"내가 출발할 때 전화하라고 했잖아!"
"아니- 작업실에 가면 전화할라구 했지. 아휴 왜 걱정을 하고 그래요. 별일도 아닌데. 헤헤..."
"별일이 아니게 생겼냐고! 시간이 몇 신데 인마!"
"어이구. 인마가 뭐야. 왜 화를 내요?"
급하게 걸려 온 전화에 그는 이미 좀 화가 나 있었다. 출발할 때 전화하라고 했는데 왜 안했냐고, 지하철이 대충 이쯤이면 끊길 것 같은데 얼마나 속이 탔는지 아느냐고 화를 냈다. 문자를 보내고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애간장이 녹아 사라질 것 같았는데 태평하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꺄르륵 거리는 내 반응에 화가 터졌다고 했다. 고작, 열 시였다.
지하철보다 버스가 빠르게 도착하고, 버스는 열 시엔 끊기지 않는다고.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고, 당연히 작업실에 도착해서 연락하려고 했다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일까.
뭔가 같이 화를 벌컥 내고 '자! 싸우자!!' 하고 싶은 마음이었기도 한데, 그와 다르게 나는 화가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알고 싶고, 이해가 안 됐다. 싸움 실패.
회사와 급한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도중에도 나한테 연락이 올까 봐 핸드폰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늦어진다고 미리 말했는데) 세상이 흉흉하고 온갖 이상한 뉴스가 넘치니까 혼자일 귀갓길이 걱정되었다고 했다. (그건 완전 그럴 수 있지) 머릿속으로 대충 지하철의 막차 시간을 떠올려보니까 이제 슬슬 막차일 것 같아서 걱정이 더 늘었다고 했다. (아니 요즘 막차가 그렇게 빨리 끊기나요? 열 시에??) 근데 그 정도 시간인 되었는데 집에 간다는 연락이 없어서 애간장이 녹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쉽게 녹는 것이었나요...) 신나게 노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문자를 한통 보내보았다고 했다. (고마운 마음이었네) 근데 내가 이미 출발했다고 해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하고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고 했다. (출발했다고 하면 다행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는데 별일 아니야 나 작업실 근처야 하고 내가 너무 꺄르르르 태평해서 욱 했다고 했다. (그게 제일 이해가 안되는데 왜?) 마음을 졸이면서 애타 하던 자기의 걱정이 너무 아무것도 아닌 취급이 되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고 했다. (아니 그러니까 걱정을 안 했으면...)
"그럼 내가 뭐라고 대답했으면 화가 안 났을까요? 내가 어떻게 해야 했어?"
"그건 잘 모르겠어."
"흐음..."
"화내서 미안해. 걱정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잘 안되네. 감정을 숨기는 게 잘 안 되는 사람이어서."
"흐음..."
"내가 화내서 기분이 상했어?"
"아니... 이해가 안돼서요. 잘 모르겠어."
"그렇구나..."
"그... 걱정은 마음속으로 할 때만 걱정 이래. 입 밖으로 내밀기 시작하면 걱정이 아니고 잔소리가 된대요. 걱정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잔소리를 좀 줄이면 좋겠어요. 좋은 말도 반복하면 잔소리 되잖아. 일단, 내가 막 늦게까지 놀다가 길바닥에서 자고 그런 애가 아니고, 집에 잘 들어가고 조심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걸로 누구한테 걱정을 끼쳐 본 적이 없으니까."
"알지 알지, 아는데. 세상이 좀 흉해. 당연히 내 사람 내가 챙겨야 하고, 내 사람 내가 걱정해야지."
"응. 알지."
"화내서 미안해."
"괜찮아-"
어떤 방법이면 저 사람의 걱정을 좀 줄이고, 나는 조금 편해질 수 있을까를 잠들면서 고민했다. 나한테는 너무 별 것 아닌 일이 저 사람에겐 저토록 중대한 문제일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나는 오늘처럼 또 별일 아니야 괜찮지- 하면서 꺄르륵거릴 일 투성이인데 괜찮을까. 아휴 뭐가 저렇게 심각해, 대충 살지.
하지만, 다음날 저녁.
나한테 주고 싶은 것들로만 양손 무겁게 이것저것 챙겨서 우리 집으로 온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에 마음이 또 스륵 하고 녹았다.
걱정을 줄이고 싶지만 안 할 수는 없다는 사람. 화를 내지만 다시 전화해서 차분하게 왜 화가 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꽃을 사 오기라도 하는 사람이어서.
"근데 꽃을 어떻게 샀어요? 그렇게 차가 밀린 길을 오면서."
"문자로 주문했지. 몇 시쯤 픽업 가겠습니다. 이런 이런 꽃인데 이런 컬러의 꽃을 넣어주시고, 이 컬러의 이 꽃을 포인트로 해주시고 하면서."
"아이고... 예민한 손님이시다 하고 꽃집 주인이 놀랬겠네."
"이건 말하신 것보다 진한 컬러고, 저 꽃은 연한 컬러가 있고 하고 설명해주시더라고."
"나 참... 꽃집 주인한테 미안해지려고 해."
"예쁘지 좋지?"
"꽃이 있으니까 집이 화사해서 좋아요. 꽃 너무 좋아."
"이 집엔 원래 꽃이 있는데?"
"무슨 말이야? 꽃이 어디 있어요?"
"너"
"뭔 소리야?"
"네가 꽃이잖아. 꽃보다 예뻐."
"미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