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하고 찌질해도 괜찮아
삽질의 달인 양미숙
안면홍조증이 있는 29세의 러시아어 교사 양미숙은 같은 학교 선생인 서종철과 자신이 썸을 타고 있다고 착각 중이다. 종철이 회식 자리에서 자신의 옆에 앉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또 미숙은 칭찬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로, 동료 교사에 대한 질투심과 열등감도 가득하다. 자신은 러시아어가 비인기 과목이 된 상황에서 중학교 영어 교사로 좌천되어 팔자에도 없는 영어를 가르치려고 학원까지 다니는데, 동료 교사 유리는 (예쁘고 상냥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러시아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꼬일 대로 꼬여버린 미숙의 삶이 한 번 더 엉켜버린다. 유리가 종철과 불륜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미숙은 종철이 이혼하고 유리와 본격적인 교제를 시작하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종철의 딸 종희에게 접근한다. 종희는 미숙과 힘을 합쳐 엄마 은교의 출국을 막고 이혼을 유예시키기로 한다. 미숙과 종희는 학예회에 은교를 초대해 연극을 상연하기로 하고 연습에 돌입한다. 동시에 이들은 유리가 종철을 멀리하게 하려고 종철의 메신저 아이디로 성적인 메시지를 꾸며내 유리에게 보내지만, 오히려 유리는 이 메시지로 인해 자신의 성적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미숙은 만취한 종철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대망의 학예회 날, 미숙과 유리, 종희, 종철과 은교가 한자리에 모이는데…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잖아요”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들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상식적이었던 미숙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영화에 두 차례 나오는 ‘단체 사진’씬이다. 영화 전반부, 고등학생이었던 미숙이 단체 사진을 찍는 학급 친구들 뒤에서 다짜고짜 점프를 한다. 사진 속 미숙은 허공에 떠 있다. 얼굴은 찌그러졌고, 몸은 이상하게 기울어져 있다. 미숙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 말미가 되자 학생들이 서로 팔짱을 꽉 낀 채 일부러 미숙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미숙이 사이에 끼어 들어가 보려고 애를 썼지만 누구도 그녀를 끼워주지 않았고, 사진 기사가 숫자를 세자 다급해진 미숙이 허공을 향해 뛰어 오른 것. 박제된 사진 속에서 단순히 미친 여자로만 보였던 그녀의 모습은 사실 ‘여기 내가 있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미숙의 말마따나, 삽질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살면서 누구나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도 습관적으로. 나 또한 미숙보다 경미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데, 이 때문에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 적이 있다. 어릴 적 또래보다 조금 덩치가 컸던 나는 이름 대신 돼지 아니면 못생긴 만화 캐릭터로 불리며 놀림을 당하곤 했다. 폭력을 폭력으로 응수하지 말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놀리는 아이들을 때리고, 침을 뱉고, 또는 그들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식으로 응수하면서 나는 그것을 일종의 놀이로 승화시켰다. 눈물을 보여 날 놀리던 남자아이들에게 이겼다는 느낌을 받게 하기도 싫었고, 선생님의 개입으로 상황이 정말로 진지해지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방과 후 남아서 선생님에게 혼나기를 감수하고 자발적으로 ‘돼지 조폭 마누라’가 되어 남자아이들을 응징했다.
그러던 내가 페미니즘을 만나 타인의 외모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매우 차별적이고 잘못된 행위임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신체와 아름답지 않은 신체를 분리해 점수를 매기고, 놀리거나 찬양하는 문화가 여성을 사회의 일원이 아닌 그저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왔던 내가 가여워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장난이라며 쿨한 척을 했고, 미숙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미친 여자가 되었으며 사랑받기 위해 사랑을 구걸했다. 이건 단지 나와 미숙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나 열등감이나 질투심 때문에 오해하고, 오바하고, 자빠져본 경험이 있다. 혼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내 친구는 지적당하기 전에 미리 뭘 잘못했는지 미리 구구절절 말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외모에 대한 나쁜 평가를 듣기 전에 “전 아름다운 편은 아니죠”라며 부러 객관적인 척을 한다. 그런데, 아무렴 어떤가? 앞뒤 사정은 삭제된 채 우리의 삽질만이 찍힌 한 장의 사진을 모두가 비웃으며 놀릴 때, 이 영화는 누구에게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며 등을 거칠게 토닥인다.
불완전한 연대
‘여적여’라는 신조어가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를 줄인 말로, 여자들이 타당한 이유 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질투한다는 뜻이다. 여성 직원이 많은 직장에서 일어나는 따돌림, 여성 연예인들 간의 다툼에 대한 기사가 뜨기라도 하면 꼭 ‘여적여’라는 댓글이 달린다. 이 단어는 모든 여성이 질투가 많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렇지 않은 여성들의 경험을 배제한다. 또 이 용어는 사회적인 사건의 원인을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에만 귀결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직장 내 왕따를 예로 들어보자. 왕따가 가능한 데에는 수직적인 권력 구조, 신고 접수를 할 수 있는 창구의 부재 등 정말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왕따의 원인을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에서만 찾는 것은 틀린 접근일 뿐더러, 다분히 차별적이다. 그래서 ‘여적여’ 프레임에 대한 대안 중 하나로 ‘여돕여’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이솜, <멜로가 체질>의 전여빈처럼 불의에 맞서 다른 여성을 구해주는 히어로를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투와 열등감으로 점철된 <미쓰 홍당무>의 여성 캐릭터들은 여전히 ‘여적여’ 패러다임 안에 갇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여자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돕는다. 그 돌봄의 모양이 이솜이나 전여빈 같이 멋있지 않고, 불완전하고 찌질할 뿐이다. 먼저 미숙과 종희는 서로를 돕는다. 이혼을 막기 위해 연극 연습에 돌입한 둘은 서로를 업고 등을 늘리는 스트레칭을 하며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는 대사를 반복해 연습한다. 어깨가 굽을 정도로 위축되어 있던 미숙과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종희는 이 장면에 와서야 스트레칭을 핑계로 비로소 허리를 편다. 그리고 연극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수고를 인정받고, 서로를 인정해준다.
미숙도 본의 아니게 유리를 돕는다. 남자들과의 관계에 있어 수동적이었던 유리가 미숙의 작전을 계기로 스스로의 성적 욕망을 발견하고, 종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설 용기를 낸다. 은교 역시 미숙을 돕는다. 자신의 남편과 동침한 미숙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은교는 쉬지 않고 산만하게 허튼일을 꾸며왔던 미숙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아 사유의 시간을 준다.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라고 답한 미숙은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음식점에서 식사를 주문하듯 이렇게 외친다. “사모님, 2번 새 출발로 하겠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부당한 프레임을 타파하기 위해 꼭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여자들이 왜 걸크러시도, 히어로도 되지 못할까 고민하며 자괴감에 빠지는 대신 미숙을 보며 인정받기 위해 졸렬하게 투쟁해온 자신을 가엽게 여겨주면 좋겠다. ‘미숙’하고 불완전한 개인들이 등을 맞대고, 힘을 합치고, 생각할 시간을 갖다 보면 언젠가 새 출발이 가능해질지도 모르니까.
이 글은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2021년 7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