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
* 연극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주의.
어떤 고요함은 불편함을 수반한다. 꼭 내어야만 하는 목소리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해 만들어낸 평온함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소리들을 인지하고 귀를 기울이는 순간 인위적인 평화는 깨진다. 그 사이에서 새어 나온 ‘불편함’은 다시 회수할 수 없다. 대체적으로 그렇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다시 어딘가에 쑤셔 넣지 않는 이상. 수면 위로 드러난 이 감정을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고 언짢은 얼굴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 연극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는 여러 죽음을 기반으로 고요함을 ‘깨부수는 것들’에 대한 연쇄를 보여준다. 연극이 시작되고 오직 빗소리만이 가득하던 무대 위의 적막함을 깨뜨리는 것은 토오루에게 부탁하는 요시오의 목소리다. “립스틱 발라줘.” 예상할 수 있듯 요시오는 극 중 성 정체성에 혼란을 반복해 느끼다 본인이 트랜스젠더임을 깨닫는 성 소수자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요시오가 솔직해질 수 있는 곳은 오직 무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 속이다. 어쩔 수 없이 감추지만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듯한 얇은 커튼 사이로 보이는 요시오의 모습은 가장 그답다. 그 컨테이너 박스는 일종의 방공호인 셈이다. 작중 그 공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총 셋이다. 요시오의 어떤 모습이든 전부 다 예뻐해 주던 누나 카즈에. 진실만을 담는 카메라를 통해 가장 요시오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던 전쟁 저널리스트 타쿠지. 그리고 요시오의 마지막을 곱씹을 즈음에야 망자를 위하는 법을 깨닫게 된 장의사 토오루. 전부 다 그의 진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 주던 사람들이다.
한편, 세 사람과는 조금 다른 듯한 요시오와 유우카의 관계 역시도 주목해 볼 만하다. 카즈에의 친구이자 토오루와 함께 장의사 일을 하고 있는 유우카는 카즈에 사망 이후 컨테이너 박스에 처박혀 나오질 않는 요시오를 밖으로 꺼낸 유일한 사람이다. 유우카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하이데거의 철학을 인용해 제시하면서 요시오에게 ‘평범’이라는 것 역시 인간이 만든 개념이라며 자신의 진심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유우카는 카즈에, 타쿠지, 토오루처럼 요시오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다. 특정 단어로 표현하기엔 모호한 관계라 남에 가깝지만 세 사람에 비해서 더 거시적이고 이상적인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시오 같은 사람의 인생에는 카즈에, 타쿠지, 토오루보다 유우카 같은 사람 여러 명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모든 관계에 솔직하기란 쉽지 않다. 진심을 모든 이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고. 이러한 사이가 다수이기에 진심을 나눈 소수의 사람들이 더욱 소중해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나 ‘커밍아웃’의 문제로 직결될 퀴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들에게 ‘유우카적 사고’는 반가운 것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임을 인지하고 평범과 ‘비’평범성이라는 이분법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요시오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봐주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이라고 하기엔 조금 먼 ‘근처’ 사람까지도 한 인격체를 그저 존재 자체로 수용하는 이상적인 모습. 유우카는 그 태도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요시오에게 알려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도록. “너의 쇄골에 카즈에가 잠들고 있습니다.”라는 말에 담아서.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에는 퀴어를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전쟁, 길고양이 로드킬, 뺑소니 사고……. 물론 요시오와 타쿠지의 모티브가 된 실화 사건과 인물들이 존재하지만 단순히 소재만 나열했을 때에는 연관성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끝까지 엮어내고 100분이 넘는 러닝타임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을지 연극을 보고 나와서 계속 곱씹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극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전부 우리가 애써 무시해 오고 있는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생각해 보자. 전쟁의 경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말 얹을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각을 못 하고 있을 뿐 –최근 들어 빈번히 날아오는 오물 때문에 조금 실감하는 정도는 되어도.- 대한민국은 엄연한 휴전 상태다. 다만 휴전 상태가 오래 이어지고 있어 6.25 전쟁 세대와 점점 멀어질수록 자각하기가 어려워지는 것뿐이다. 이외에도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이 한두 개가 아니다. 뉴스엔 등장하지 않아 모르고 지나가는 전쟁도 있을 테고.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그저 뉴스의 헤드라인 혹은 SNS 등에 등장하는 짧은 영상으로만 이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 일상은 전쟁과는 동떨어진, 아주 평화롭고 평범하고 잔잔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외에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끝없이 고민하고 숨기기도 하고 커밍아웃하기도 하고 권리를 위해서 싸우기도 하는 등 내외적 갈등을 겪는 성 소수자들은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그 마이너리티에 비포함된 사람들은 그들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기도 하고 존재 자체를 지우고 부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소수자들은 쉽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전쟁과 퀴어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마주하기엔 조금 ‘불편한 것’들이다. 당사자성이 없는 자들은 이 이슈를 무겁고 어려운 주제로 치부하며 피하려 하고 어떤 경우에는 무서운 방법으로 세상에서 지우기도 한다. 차량 뺑소니 사고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죽이든 사람을 죽이든 범인이 왜 도주하겠는가. 자신이 사고를 냈다는 사실이 무섭고 불편하기 때문에 도망가는 것이다. 이 불편함을 무시하고 모른 척하면 금방 잊고 훌훌 털어버리고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다시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결말에 다다른 순간, 요시오는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이 질문은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요시오는 그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평온함을 깨부수는 것들의 가운데에 서 있던 게 바로 요시오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사회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린다. 타쿠지와 요시오가 전쟁 현장에서 납치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지만 일본 정부의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망한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고양이들을 묻어주려던 카즈에는 어떤가. 친구 유우키의 행동을 보고 용기를 내었던 그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 이들은 다른 인물의 쇄골에 잠든다. 타쿠지는 아내 마사미에게, 카즈에는 요시오에게. 그리고 요시오는 극의 끝에서 토오루에게 묻는다. “너의 쇄골에서 잠들어도 돼?”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는 말은 그대로 죽은 이를 가슴에 묻는다는 하나의 비유에 가깝다. 하지만 앞서 나눈 이야기의 맥락을 바탕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망자들은 곧 ‘불편함을 유발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들을 쇄골에 잠들게 두었다면 절대 그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행동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타쿠지의 만류에도 전쟁 현장까지 나아간 요시오의 의지. 다 잊혀진 사건이라고 주변에서 만류해도 타쿠지와 요시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 내려가 계속 이야기하고 말 것을 다짐하는 마사미.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토오루 역시도 불편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토오루의 쇄골엔 요시오가 잠들어 있으므로.
우리의 쇄골에도 각기 다른 것이 잠들어 있을 테다. 그리고 그것들은 살아가다 한번씩 통증을 줄 것이다. 지금, 꼭, 지금 나서야 한다고, 행동해야 한다고 신호를 줄 것이다. 어쩌면 시그널을 받을 새도 없이 불편한 것에 대해서 발화해 버리고 모든 것을 깨달을지도 모르고.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요시오가 했던 질문들 말이다. “What did you do today?” 혹은 “What did you to die?”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