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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한 Jan 20. 2022

물어본다

그는 나와 비슷한 키에 뭔가  건장한 느낌을 주는 청년이었다. 185cm 몸무게는  85kg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을 하곤 했었다. 카페를 운영하고  해가 지난 뒤부터 거의 매주  번씩은 보던 사이였다. 세어보니, 서로가 안면을 트게  것은 거의  년이 되었다. 그동안 별다른 안부를 주고받았던 적은 없었다. 그는 줘야  무거운 물건을 사뿐히 내려놓고 조용히 가는 편이었다. 그가 차분한 말투로 택배가 왔다고 이야기를 하면, 나는 좋은 하루를 보내라든지, 고생하시라든지,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와 내가 이 공간 밖에서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오 년 전인가, 카페 거리에서 프리마켓을 열었던 적이 있다. 김해에서 가장 큰 온라인 커뮤니티인 소감아에서 행사를 주관했었고, 그때는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정치인들도 방문했었다. 거리가 제법 떠들썩했었다. 차량을 통제했기 때문에, 도로에는 정말이지 인파가 가득했었다. 사람이 가득한 한여름의 워터파크처럼 이곳도 그런 곳으로 갑자기 변하는 듯했다. 둥둥 떠서 물결처럼 사람이 떠밀려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날은 나도 마침 비번이었기 때문에,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구경을 나왔던 참이었다. 아내는 서우의 손을 잡고 걸었고, 아직 걸음마가 서툴렀던 온이는 내 어깨 위에 목말을 태워서 걸었다. 그러다, 온이 또래의 딸을 목말 태워 걷고 있는 그와 마주쳤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우리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웃으며 인사를 했고, 나도 같은 표정으로 인사했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더 어떤 말을 주고받을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잠깐 눈을 마주치고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허공에 안부를 물었지, 서로의 눈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그 일이 있었던 이후에 생긴 작은 변화였다. 그는 여전히 무거운 짐을 사뿐히 내려놓고 갔었고, 그런 시간이 몇 해가 되었다. 그러다, 한 달 전부터 그가 보이지 않았다. 가게 앞에 택배는 도착해있는데, 인사가 없어서 일이 많이 바빠졌나 싶었다. 어떤 회사에서 파업해서 물량이 늘었나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택배를 내려는 놓는 것이 눈에 띄었다. 등을 돌려 탑차를 향해 뛰어가는 기사를 불러서 그 사람의 안부를 물었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수술을 해야 하고, 반년 정도 일을 쉬어서 자신이 대신 이 코스를 맞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듣는 순간 뭔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고 나는 눈물이 났다. 그냥 흘려버렸고 나는 그것이 무책임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냥 그렇게 조금 흐르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나는 내 몫의 감정을 소비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 주가 지나서 뜻밖에 그를 만나게 되었다. 절뚝거리며 아니, 나와 비슷한 키의 그가 휘청거리며 짐을 들고 오고 있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눈을 마주치고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그를 붙잡고 처음으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푸석한 표정의 그는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냐고 물어보았다. 그에게 줄 커피를 만들면서 이 코스 맞게 되었다는 분에게 물어봤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대에 올라가면 일을 쉬어야 하므로, 그냥 참고 일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물어보고 싶은 말을 물어볼 수 없었다.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그 상처가 참는다고 해결되는 문제인지,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인지, 그런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커피를 내려주는 것 외에는, 눈을 마주치는 것 외에는, 하루의 평온을 빌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도무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위태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명절을 앞두고 이어지는 어떤 택배 회사의 파업을 두고, 불편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통신 판매를 하는 사람들도, 나처럼 택배로 장사할 원재료를 받는 사람들도 모두 불편함을 호소한다. 그런데 나는 불편하지만,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은 이해된다. 그것은 아마도 나는 그들의 눈을 보면서 안부를 여쭈는 사이가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좋은 하루를 보내라며 또 다른 곳으로 짐을 옮기는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대략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허공이 아닌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안부를 물어보면, 그들의 아침이, 그들의 식사가, 그들의 가족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 60시 근무, 택배비 원가 인상, 택배 분류 작업제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닌데,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니 점점 거창한 일이 되어간다.


어느 순간 나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은 사치가 되어가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세상을 방치한 채 나의 소비와 안위가  제일 중요한 세상 속에서 늙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현대인의 삶인가, 삶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은 방치하는 것이 옳은가, 그것을 허공에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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