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한 Mar 03. 2022

사랑과 장사를 함께 잘하려면

사랑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나에게 심어준 책은 <파페포포 메모리즈>라는 책이다. 당시에 나는 군인이었고 여자 친구도 없었지만, 기간병 화장실에서 읽게 된  책의  구절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쩌면 내용보다는 그것보다는 당시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지 싶다.


나는 그 책을 정말이지 반복해서 읽었다. 이등병, 일병 시절 읽을 수 있었던 책은 야전교범 밖에 없었다. 건조장 뒤편에서 결산이 걸리면 선임들은 웃지 말 것, 상병을 달 때까지는 사제 책을 읽지 말 것, 이런 말을 하곤 했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도 용감한 편은 아니었으므로 그런 룰에 저항하지는 못했었다. 그렇게 뭔가 모르게 틀어져가는 졸병 시절의 나를 위로했던 것은 담배, 그리고 화장실 양변기에 올려놓아져 있던 몇 권의 책이었다. 위로의 장소로는 어색한 그곳에서 내가 제일 즐겨 읽었던 <파페포포 메모리즈>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어느  당연한 듯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랑하게 되고  징표로 나무를 심게 되지만, 얼마간 시간이 흐른 어떤  무언가 시들어가는 것처럼 헤어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이유는 기억에 나지 않는다. 마음이 떠나서 이유를 만들어낸 뒤에 헤어지게 되었는지, 이유가 생겨서 마음이 떠나게 되었는지는 모호하다.  세부적인 이유에는 아마도 나의 연애 경험과  뒤에 읽게  몇몇 책들의 이야기가 먼지처럼 쌓여버렸기 때문이지 싶다.


  책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렇게 이끌어 나간다. 이별 뒤에  사람은 조금은 다른 삶을 살게 되지만,  다른 사람은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나무를 돌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가 흘러, 나무가 담벼락을 넘어 설정 도로 웃자라고 열매가 맺혔을 ,  나무를 기억한 사람이 돌아와  사람은 다시 연인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보고, 연인이 없었던  시절 나는 그렇게 기분이 따뜻해졌었다. 머릿속에서 씨앗 하나가 심어지는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을 작은 씨앗이.


그래서  이후에 나에게 사랑이라 느껴지는 감정이 왔을 , 지켜주고 보살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후로 오랫동안, 거의 이십  동안 사랑에 대해서 고민을 한적은 없던  같다. 어느 순간 사랑은 뒷전이었고,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이지 싶다. 며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다시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목을 보았을 , 어떤 세세한 테크닉이 명시적으로 적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기술된 내용이 많았다. 이를,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관한 . 등가 교환 법칙이 지배된 세상에는 거의 모든 활동에도 그것이 적용된다고 하고 있었다. 주는 만큼만 받는 , 만족스러운 소비가 중요한 세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랑도 활동이므로 여기서 어떤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이라 했다.


세상의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게 중간 정도의 열심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듯하다. 이를테면 받은 만큼 일하고, 분업된 생산 체계 아래에서 자신의 파트에만 집중한다. 그렇게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서 중용을 가장한 적당한 노력을 유지하는 것이 현대인의 현명한 삶의 태도인  같다. 그것은 여전히 대중에게 각광받는 처세술이고, 연애의 방법을 논하는 몇몇 책에서도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균열을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적당주의 속에서 합리적으로 사는  하지만, 오히려 불안하고 고독해지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접하게  부모의 사랑이, 여러 가지 활동이, 이해로부터 자유로운 관계가 이상향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지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머리가 굵어지고 몸을 사리며 살아가게 될 때,  오히려  우리 고독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살 아기 때문에, 우리는 잠을  때도 온전하게 잠들지 못하며, 깨어있을 때는 반쯤 졸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랑을 처음 고민했던 시절로 돌아가자면, 그곳은 부조리가 만연한 곳이었지만, 적당히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행운이었던  같다는 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떤 전투 보병 사단의 전투력의 초석을 창출하는 신병교육대대의 조교로서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라는 말을 매일 조례 때마다 우렁찬 목소리라 외치곤 했었다. 군생활의 미덕은 중간 즈음하는 것이라 충고하는 선임도 없었고, 몸을 사리는 후임도 없었다. 위국 헌신하면 제대라는 완벽한 엔딩이 있어서 그랬던  같기도 하고.


제대 후에도 나를 밀어붙이는 듯한 태도 제법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복학 후에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졸업하고  번의 시험 떨어지고 비정규직 교사를 하면서 학교와 도서관을 왕래할 때도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고, 요즘은 풀리는 일보다 풀리지 않은 일들이 많다 보니 적당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참이었다. 어느덧 몸을 사리는 내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기술> 읽고 보니 새로운 씨앗 하나가 심어진 기분이다. 다시 한번 잠이  때는 죽은  자고, 깨어 있을 때는 정말로 온전히 깨어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닿는 모든 사람에게 기교를 부리지 않고 사랑하듯 대하다 보면, 등가 교환 법칙을 넘어서는 조금  나은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예감 드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일과 관계를 아우르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만은 잘하고 은데, 그것이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낭만적이고 희망적이다.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믿고 싶은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