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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한 Feb 27. 2022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사태에 대해서 말을 보태는 것은 어쩌면 부끄러운 일인  같기도 하다. 어차피 거의 모든 것이 분리된 듯한 사회 속에서, 나도 겨우 살아가고 있는데,  나를 누르는 불안도 어떻게 하지도 못하는데  나라의 전쟁에 무슨 신경을 쓰고 있느냐는 사람도 있을  같다. 그런데도 보고 있으면 울렁거린다. 계속 올라오는  나라의 사진과 동영상, 기사를 보고 있으면 손이 떨려서 뭔가라도 해야지 싶은 것이다.


유리창이 모두 깨어지고, 두부처럼 허물어진 건물보다, 포탄으로 밝혀지는 어두운 밤보다, 아무래도 나를 떨리게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징집된 아빠와 아직 유치원에 다닐 법한 어린 딸이 버스 앞에서 생이별하는 모습,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무기를 드는 사진을 보면서, 그런 와중에서 서로에게 살며시 기대어 미소 짓는 표정을 보면서 뭔가 해야 된다는 것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지구가 공전하고 태연히 봄이 온다는 것이 뻔뻔하게 느껴질 뿐이다.


차라리 오늘처럼 지독한 황사라도 계속 이어졌으면. 그래야, 사람들이 죄지은 듯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오래 볼 테니까. 그러다 보면 우연히라도 전쟁의 비극이 더 널리  알려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국제 사회는 이런 와중에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우크라이나가 5,000발이나 되는 핵탄두를 포기하게 만든 부다페스트 각서의 당사자인 영국과 미국도 앉아서 공염불만 하고 있다. 행동을 하게 되면 3차 대전이 일어날까 봐 그런 것이겠지. 그래서 그들도 개인인 나처럼 입만 나불대고 있는 것이겠지 싶다.


우크라이나는 누가 구원해줄 수 있을까. 폴란드에서 난민들을 받아주고 있지만, 그곳에서 수만수십만의 사람을 받아주더라도 그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믿을 만한 것은 세계 시민들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호주의 멜버른에서, 영국의 런던에서, 일본의 도쿄에서도 젊은이들의 반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랜드마크에 해당하는 건물의 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서도 젊은이들이 일어서 공권력의 압박 속에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한미동맹을 더 밀착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봐서라도 핵무기를 포기할 일이 없으니, 우리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각국의 군비경쟁에 대한 목소리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한데, 이미 찍어놓은 돈을 소모하는 입장에서 그것도 괜찮은 것 주장인 것 같기도 하지만, 글쎄 생각할수록 아닌 것 같다. 세상의 수많은 국가가 미사일 버튼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 버튼은 누군가가 누를 수 있다고 여겨진다. 민주주의는 늘 옳은 사람을 왕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는 언젠가 눌러볼 것임이 분명하다. 푸틴처럼 말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분명 누군가는 대통령이 될 것이고, 그들이 결국은 나를 대신해서 내 딸을 대신에서 의사결정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보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해야, 두 딸과 헤어지는 일도 없을 테고, 저공비행하는 전투기 때문에 모든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지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전 시위를 한다면 나갈 생각이다. 가서 촛불을 들고 얼마간 돈을 내고, 시간을 보내다 올 생각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계절에 속해서 태연하게 하늘을 보며 산다는 것이 민망한 상황이라고 여겨진다. 사람이 사람에게 누군가 죽이라고 명령하면 죽이고, 그렇게 죽임 당하는 세상에 속해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그런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고 두 딸과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평화로운 거실에 숨은 듯 앉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착잡하다.


역사의 심판이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신이 아버지처럼 혹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구원해주는 일은 요원한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부끄러운 목소리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혹시 그런 작은 목소리가 들리면 역시 작은 목소리로 응답을 해야 한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단절시키는 시스템을 탓해야 하고, 주의를 더 기울여야 하고,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 국가가 이렇게 쉽게 으스러지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으스러질 것이라 상상해도 좋다. 그렇게 한쪽 귀퉁이부터 두부처럼 무너지는 세계가 도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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