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작은 도시를 디자인하는 무역박람회(Trade Fair)
현장등록을 하고 회장 안으로 들어선다. 격자형으로 나뉜 공간(부스)은 마치 땅따먹기를 해놓은듯 반듯한 네모 박스 안에서 각자의 상품을 뽐낸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전시부스(Stand, Booth) 각각의 디자인은 제자리에 서서 멋을 발산한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회장 안쪽에선 시간대별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강연, 포럼 등)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회장의 가장 가장자리 공간에는 목마름을 채워주는 음료자판기와 텅 빈 지갑을 채워줄 ATM기가 위치해 있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대략 머릿속에 그려지는 무역박람회(Fair) 현장의 모습이다. 격자형(Grid)의 구조, 천장과 벽의 사인물. 그 표시를 따라 들어가게 되면 만나는 이벤트, 회장 외곽을 둘러싼 서비스 공간 구성…. 낯설게 느껴지는 장소지만, 우리의 사전경험은 그곳을 이미 가본 듯한 인상을 준다. 이처럼 공식화돼 있는 무역박람회장 구조(Layout)에 ‘왜’ 또는 ‘어떻게’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항상 노출돼 있는 공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펴고 혹은 간판을 따라 목적지에 다다르는 여행을 하듯, 어딘가 익숙한 구조다.
▲ 베르가모 피에라와 도시, 1934 ‧사진출처= 마우로 젤피, ‘베르가모의 피에라’, Bergamo, 1993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 베르가모(Bergamo)에 가면 키오스트로(Chiostro)라는 작은 석조건물들이 격자형으로 모여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곳을 이탈리아에서 가장 번영했던 피에라(Fiera, 영어 Fair의 이탈리아어)라고 기억한다. 밀라노와 베네치아공국 사이에 있었던 작은 도시국가 베르가모는 800년대 이탈리아 전역, 주변국가로부터 찾아온 사람들의 교역 장(場)이 되면서 도시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했던 피에라는 초기엔 천막과 나무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1591년 화재로 목조가 모두 불타버리면서 피에라 구성의 큰 틀은 유지한 채, 1734년부터 석조건물로 재건축을 시작했다. 6년에 걸쳐 조성된 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는데, 540여 개의 공방(Bottega)이 입주할 수 있었다. 키오스트로 사이에 난 14개의 길은 (124개를 제외한) 모든 키오스트로에 4면이 외부와 접촉하는 구조다. 중앙엔 커다란 분수를 두어 똑같은 건물들 사이에서 방향감각을 잃지 않도록 지었다.
베르가모 피에라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 내 다른 도시의 피에라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물론 베르가모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식 피에라가 존재한다) 우리나라 컨벤션센터처럼 거대한 구조물 안에 넓은 공간이 아닌, 이 작은 건물 구조의 집합이 피에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약한 목조를 석조로 바꿨을 뿐인데, 계획도시처럼 중심축과 랜드마크(분수대), 반듯한 도로, 그리고 일정한 면적을 갖고 있다.
저절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면, 지금의 도시계획은 구획을 나누어 각기 다른 성격을 부여한 지역의 집합으로 나눠진다.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 신도시 계획 업무를 수행할 땐 어떠한 도시인지 그 여하를 막론하고 격자형 구조의 블록형 도시가 탄생하기 마련이다. 또한, 도시의 축이 되는 랜드마크 또는 대형 호수와 같은 중심축을 만든다. 결국 이를 무역박람회(Fair) 현장과 비교해보면 격자형의 구조, 네모난 공간의 4면이 모두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열린 공간(Void), 길 찾기에 용이한 중심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전시회장 디자인은 도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박람회장을 디자인 할 땐, 우선 커다란 주요 동선을 정한 후 전시부스의 공간을 구획한다. 관람객의 길 찾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사인물을 고민하며, 박람회장 전체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봤을 때를 고려해 일종의 무대 디자인적 요소를 검토하기도 한다. 이는 도시 내 순환과 도시의 경관을 이야기하는 도시 디자이너들의 작업과 매우 유사한 방식이다.
도시 안에서 다양한 건축적인 시도와 마찬가지로, 박람회에서는 새로운 전시부스 형태와 구조물 디자인을 시도한다. 특히 정해진 시간 안에 관객들과 소통을 위한 공간의 개폐에 대해 많은 실험이 진행되는데, 이는 오늘날 다양한 스탠드 디자인에서 개방형, 폐쇄형, 혼합형 등 마케팅 전략으로 정리돼 있기도 하다. 다만 전시회장은 만들어지는 데 도시만큼 넉넉한 시간을 보장하지 않는다.(석조 구조물의 베르가모 피에라도 연중 일정한 기간만 쓰였다) 단시간 내 만들어지고 해체돼야 하는 무역박람회의 운명상, 석조물과 같은 영구적인 건축 방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박람회는 전통건축과 작별을 고하기에 이른다.
1980년대만 해도 장인들에 의해 진행됐던 전시부스는, 1980년대 후반 모듈러 시스템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일시적인 건축물로서 가능성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설계(Pre-designed)된 모듈을 통해 스탠드를 만들어내는 데 비교적 적은 양의 에너지가 투여됐다. 구조물을 해결하고 나니 한정된 시간 내 그 이외 디자인적 요소에 대한 고민이 가능할 수 있었다. 전시회장 바닥에 적용된 그리드(Grid) 시스템을 공간의 수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회장의 레이아웃은 점차 계획도시의 성격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전시부스를 벗어나 그 외의 공간까지 시선을 넓혀본다. 넓게 보니 생각보다 많지 않은 영역이 전시를 위한 공간(Display area)에 할애돼 있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쉬는 공간, 서비스 공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는 공간(Void, 내부 공간의 오픈스페이스)이 존재하며, 적지 않는 영역이 공공을 위한 공간(Public area)로 구성된다. 각자의 전시부스는 개별영역과 공공영역이 만나는 접점에서 매력을 발산해 관객을 모으는 경쟁을 한다.
이외 공간은 각기 역할을 부여받고 전시회장의 원활한 동선을 이끌어내는 데 일조한다. 관람객을 위한 휴식공간이 보통 정중앙에 배치되는 이유도 회장의 전체적인 상황을 보며 다시 내부를 순환하게끔 하기 위한 전략이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행사, 강의를 위한 장소는 회장의 가장 안쪽에 배치해 그들이 단순히 목적만 수행한 후 회장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일종의 장치를 제공한다. 공간에 대한 다양한 전략들이 우리를 이 작은 도시, 박람회장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 교류의 장이 도시를 만들었고, 무역박람회(Fair)는 그 구심점으로 도시의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도시가 무역박람회(Fair)를 만들고, 박람회는 도시를 키워온 셈이다. 여전히 신도시를 계획할 때 컨벤션센터의 설계를 고려하고, 대형 박람회를 개최해 도시 성장을 꿈꾸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학습된 결과가 충분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도시 안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 낯선 이들과 대화를 하며,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찾아 나선다. 이제 우리는 무역박람회장(Fair)를 나서며, 조금 더 설렘을 가져봐도 좋을 것이다. 가장 짧은 시간에 또 하나의 새로운 도시를 경험할 수 있는 박람회. 다음 박람회장(Fair)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 마이스산업신문 <전시디자인의 세계> 기획연재 (2018.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