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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ofilm Sep 09. 2022

우연과 상상 (2021)

우연에 대처하는 일상 속의 작가들 (일본 영화/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2021)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후루카와 코토네, 현리, 나카지마 아유무, 모리 카츠키, 카이 쇼마,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

장르: 드라마, 로맨스

국가: 일본

상영시간: 121분

개봉일: 2022.05.04

이야기를 쓰는 우연의 힘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친구 '츠구미(현리)'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와 썸 타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얘기를 듣다가 '츠구미'가 만난 남자가 자신의 헤어진 연인 '카즈키(나카지마 아유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메이코'는 충동적으로 카즈키의 사무실을 찾는다. 


 '사사키(카이 쇼마)'는 섹스 파트너이자 같은 과 학생인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자신을 유급한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 교수를 함정에 빠드릴 것을 부탁한다. '나오'는 교수를 찾아가 그가 쓴 소설의 외설적인 파트를 낭독하며 유혹하려는 계획을 시도한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그녀는 교수로부터 위로를 받고, 훨씬 나아진 기분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우연은 또다른 우연을 초래해 세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20년만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다. 이런 행사에 잘 참석하지 않았던 터라 아는 친구도 없고,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동창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나츠코'는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동창생과 재회한다. 오랜 세월의 공백에도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각자의 추억을 회상하다가 '나츠코'가 사람을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연한 만남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또다른 우연을 계기로 서로를 위로한다. 

우연에 대처하는 각자의 자세

 <우연과 상상>은 세 파트로 나뉘어진 구성을 통해 우연에 대처하는 인물들의 각기 다른 자세를 그린다. 1장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우연히 헤어진 남자친구와 절친의 관계를 알게 된 '메이코'는 충동적인 행동을 벌인다. 2년 전 바람을 펴서 '카즈키'와 결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가 아직도 사랑한다는 듯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갖고 놀고, 상처주는 그녀의 행동도 거기까지다. 상상 속에서는 우정 따위 잠시 잊고 둘 중 한 명을 택하라며 '카즈키'에게 잔혹한 행동을 벌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친구를 위해 한 발 물러서는 선택을 한다. 


 2장 '문을 열어둔 채로' '나오' '세가와' 교수의 삶을 망치기 위해 그를 찾았다가 도리어 그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듣게 된다. 학교에는 친구 한 명 없고,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탓에 뒤늦게 대학 생활을 시작해 자존감도 낮아지고 우울한 상태였지만 그녀에게 잠재된 가치를 알아봐 준 교수의 무덤덤하지만 따뜻한 말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우연은 또다른 우연을 초래해 파국의 결말을 낳고, 작가로서 교수의 삶은 완전히 망가진다. 대신 '나오'는 자신의 잘못으로 벌어진 우연을 또다른 기회로 삼는다. 


 3장 '다시 한 번'은 우연한 만남을 재치 있는 역할극으로 풀어간다. '나츠코' '아야'를 다른 친구로 착각해 자신의 추억을 술술 털어놓았지만 '아야' '나츠코'가 찾던 친구가 아니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다른 인물로 착각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뻘쭘한 상황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아야'는 친구와의 재회에 실패한 '나츠코'에게 역할극을 제안하고, 그녀가 사랑했던 친구 역을 도맡아 20년간 묵혀둔 진심 어린 고백을 진중하게 들어준다. '나츠코'가 꿈에 그리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연극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게 함으로써 위로와 함께 후련하게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해준다. 한 편의 연극 같던 우연한 만남은 또다른 우연을 계기로 서로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아야'는 자신이 찾고 있던 친구 '노조미'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노조미(のぞみ)'의 뜻은 '희망'. 두 사람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는 친구를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야기를 끝맺은 것은 아닐지. 

작가 세포를 깨우는 우연의 마력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인물들이 우연히 만나고, 사건의 실마리가 '우연'을 계기로 풀리는 것처럼 명확한 인과관계가 아닌 우연한 상황에 기대어 풀어가는 전개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작품에 우연한 상황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경우, 대본의 허술함이나 작가의 역량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우리의 삶에서 이야기적 소재를 만들어내는 사건들은 모두 우연히 발생한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주어진 문제를 계획에 따라 순서대로 해결하는 과정은 삶에 안정감을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재미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틀에 갇힌 일상의 틈을 깨고 우연의 순간이 찾아들었을 때, 우리 모두는 초 단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잠시나마 일상 속의 작가로 분한다. 필연은 우리가 작가로서 개입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며 머릿속에 미리 짜 놓은 시나리오에 없는 우연이 발생했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생각으로 상황을 해석해 문제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매일 같이 똑같은 아침 식사를 하고, 출퇴근 혹은 등교를 반복하는 것은 필연이며 극중 2부에서 '나오'가 몇 년 후 갑자기 버스에서 '사사키'를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다. 이 때 '나오' '사사키'에게 덥석 키스를 하고, 자신의 명함을 건넨 것처럼 우연은 마음 속에 감춰두고 있던 충동을 깨우고 지루한 내 삶에 발칙한 전개를 초래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나의 삶을 되돌아 보았을 때 언제나 내 인생을 바꾼 순간은 우연히 찾아왔다.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무언가를 선택할 때 주저하는 경우가 많은데, 평소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법한 행동들을 '우연'은 가능케 한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우연'의 불확실성을 꺼리면서도 이따금씩 반복적인 일상에 신물이 났을 때는 예기치 못한 전개와 함께 다이나믹한 사건들이 펼쳐지기를 갈망한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지만 막상 우연이 발생하면 당황부터 하기 마련이고, 영리한 작가로서 상황을 풀어나가지 못한다는 점이 모순적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사건의 규모와 상관 없이 우연의 발생을 꿈꾼다. 무던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도 맥이 끊어지고, 간헐적인 용기와 똘끼를 표출하는 내 모습도 자취를 감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우연에 의해 촉발된 세 편의 이야기를 통해 상상의 영역을 써내려간 것처럼 나 역시 우연 뒤에 이어질 빈 페이지를 다채롭게 채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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