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깔만 아름다운 추리 없는 스릴러 (케네스 브래너/갤 가돗/아미 해머)
감독: 케네스 브래너
출연: 케네스 브래너, 갤 가돗, 톰 베이트먼, 엠마 맥키, 아미 해머, 아네트 베닝, 레티티아 라이트 등
장르: 미스터리, 로맨스, 드라마
상영시간: 127분
개봉일: 2022.02.09
스트리밍: 디즈니+
'에르퀼 푸아로(케네스 브래너)'는 '부크(톰 베이트먼)'과의 인연으로 부유한 상속녀 '리넷(갤 가돗)'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리넷'과 남편 '사이먼(아미 해머)'은 친지들과 함께 나일 강을 따라 이동하는 초호화 여객선 신혼여행을 주도하고, '푸아로' 역시 이들의 일정에 동참한다. 하지만 '사이먼'의 옛 연인이자 '리넷'의 친구인 '자클린(엠마 맥키)'이 이들 눈앞에 나타나면서 두 사람의 행복을 방해한다. 불안함을 이내 감추고 있던 '리넷'이 수면제를 먹고 곤히 잠든 어느 날 밤, 총성 한 발이 여객선에 울려퍼지고 낭만적인 이집트 신혼여행은 끔찍한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뒤바뀐다. '푸아로'는 언제나 그랬듯이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주시하며 범인을 찾아 나선다.
<나일 강의 죽음>은 추리 소설의 거장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주인공 '에르퀼 푸아로(케네스 브래너)'가 등장하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세계관이 이어지는 후속작이다. 전작에 푸아로와 함께 등장했던 '부크(톰 베이크먼)'도 재출연하면서 시리즈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주연을 맡은 '케네스 브래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이어 이번 작품도 감독을 맡아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애정을 보였다.
좋은 의미로던 나쁜 의미로던 <나일 강의 죽음>은 전작과 많이 닮았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기차가 달리는 장면의 영상미나 명배우들이 총출동해 펼치는 연기 대결은 호평을 받았지만 추리물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나일 강의 죽음>은 전작에서 드러났던 장단점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나일 강,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 황홀한 배경은 마치 이집트를 여행하는 듯한 낭만을 펼쳐 놓지만 '추리'라는 장르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연출을 선보인다. 배경이 기차 안으로 한정되었던 전작에 비해 영상미와 볼거리는 풍성해졌지만 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긴장감과 재미가 떨어져 특유의 장단점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본작이 추리영화로서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밸런스 조절에 실패한 이야기의 구조에 있다. <나일 강의 죽음>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처럼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모두 다양한 이해관계로 주인공과 얽혀 있다. 따라서 조연 하나하나까지 서사를 부여하고,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꽤나 공을 들였으며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리넷', '사이먼', '자클린'의 로맨스도 비중이 크다.
즉, 푸아로의 본격적인 추리와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빌드업 과정이 지나치게 길고 여객선에 탑승한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탐문하는 과정 역시 지루하다. 추리영화라면 본디 냉철한 심장을 가진 탐정이 관객도 짜릿함을 느낄만한 추리 실력을 바탕으로 활약을 펼쳐야 하는데, 본작은 '푸아로'의 활약상이 적고 그가 범인을 밝혀내는 속도는 관객보다 느릴 정도다. 시종일관 느린 전개를 지속하다 마지막에 푸아로가 범인 색출에 성공하는 장면은 속사포처럼 대사를 내뱉으며 중요한 서사를 순식간에 흘려보낸다. 즉, 추리 과정의 템포를 조절하는데 실패한 셈이다. 이렇듯 작품의 중심이 되어야 할 탐정이 가진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다 보니 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정체성도 크게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이 이렇게까지 장르성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일 강의 죽음>의 핵심 소재는 살인도, 이집트도, 각종 범죄 사건들도 아닌 '사랑'이다. 특히 사랑 앞에서는 목숨도 기꺼이 바치는 '자클린(엠마 맥키)'의 열정은 메마른 '푸아로'의 영혼을 동요 시킬 정도였고, 그는 사랑이 초래할 수 있는 참혹한 비극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영화의 도입부에는 과거 전쟁에 동원되었던 '푸아로'의 과거 서사가 등장한다. 그는 전쟁에서 얼굴에 큰 부상을 입었고, 그를 찾아왔던 연인 '캐서린'은 기차에서 박격포에 목숨을 잃었다. 작중 시점은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지만 '푸아로'는 아직까지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했을 정도로 깊은 상실감과 상처를 안고 있었다.
세 사람의 치정극을 곁에서 지켜본 것은 '푸아로'로 하여금 탐정으로서의 차갑고 명확한 사고를 일깨우기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건드린다. 그는 사랑의 깊은 상처 때문에 사사로운 감정을 포기한듯 살아왔지만 사랑 때문에 죽음까지 맞이한 '자클린'을 통해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상을 보았다. 이는 그에게 인간 '푸아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안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자신 또한 사랑의 상처를 품고도 또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일 강의 죽음>이 추리 영화로서는 실패한 작품일지 몰라도, '푸아로'의 성장과 '사랑'이라는 고전적이고도 촌스럽지 않은 메시지를 전하는 드라마로서는 의미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