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은 거들 뿐, 산뜻하고 유쾌한 연대
화제의 개봉작이 드물어진 요즈음, 포스터 한장만으로 눈길을 끄는 영화가 나타났다. 한국 영화에서 흔치 않은 세 명의 여배우가 주연을 맡은 버디물에 X세대의 추억을 되살려줄 레트로 감성까지. 단지 여성 주연 영화라는 점에서, 여성이 주축으로 된 사회비판 영화라는 점에서 개봉 전부터 페미 영화라며 악평을 가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 페미니즘 생각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유쾌한 버디물+약자들의 연대를 통한 사회고발 영화 정도로 해석하는 게 가장 좋을 듯. 작품성이나 연출이 뛰어난 영화는 아니지만, 혹평을 받을만한 요소가 크지 않으며 한국 영화 특유의 신파도 없고, 지나친 클리셰 범벅 영화도 아니라서 무난하게 호불호 없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배경으로, 고졸이라는 이유로 대기업 말단직원으로 8년째 근무 중인 세 친구들(자영, 유나, 보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대적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90년대 을지로 갬성을 제대로 반영했는데 영화 전반에 걸쳐 깔려 있는 레트로 분위기가 주는 따뜻함과 빈티지한 감성을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들을 비롯한 배우들의 유니폼과 사복 착장, 서울 명동 거리의 분위기, 90년대 회사의 특징 등이 리얼하게 반영되면서 시대적 고증을 착실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개인적으로 "이솜"이 맡은 "정유나" 역할의 스타일링이 너무 잘 어울리고, 눈길을 끌었다. (역시 모델 출신은 다르다. 레트로한 이 작품의 무드를 트렌디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주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을 만한 부분은 바로 주연 배우들이 맡은 역할의 캐릭터성이다. 여자 3명이 등장하는 버디물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을 천편일률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배우들의 맛깔나는 연기력을 통해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똑부러지고 시크하지만, 누구보다 의리 있는 '유나'를 연기한 '이솜'과 귀여운 매력의 극단을 보여준 반전캐 '보람'을 연기한 '박혜수'는 특히나 더 캐릭터와 착붙인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너무도 다른 성격과 외모의 세 사람의 조합이 보여준 완벽한 케미가 영화의 유쾌함을 더해주었고, 캐릭터를 보는 맛에라도 내용을 덜 신경쓰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독특한 제목으로 인해 영어나 토익 관련 키워드로 작품 홍보가 많이 되고 있기는 한데, 영화 스토리 자체에서 해당 키워드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단지 관객들의 초반 흥미를 끌어들이기 위한 소재에 가까운 정도였다. 오히려 전체적인 영화 내용은 우연히 폐수 누출과 관련된 회사의 비리를 알게 된 주인공 "자영(고아성)"이 친구들과 함께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며 내부고발을 준비하고, 후반부에 이르러 회사의 수많은 직원들과 함께 가진 자들에 맞서 당당하게 연대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폐수 유출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그저 영화의 스토리를 위한 수단 정도로만 삼고 진중하게 다루지는 않은지라 사회고발 이슈에 주목하려는 의도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유쾌한 작풍과 빠꾸 없는 캐릭터들의 산뜻한 행동력은 분명 극에 긍정적인 바이브를 더해주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전개될수록 위기나 사건들이 너무도 쉽게 해결되었고, 반전이 계속 등장하긴 하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할 법한 반전인 데다가 지나치게 반전의 요소를 많이 넣으려고 하다보니 새로운 반전이 나타날 때마다 맥이 툭툭 끊겼다. 배우들의 캐릭터성이나 이 영화가 지닌 영상미가 없었더라면 너무도 평이하고 지루한 영화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막판에 세 사람이 성공적인 내부고발을 이어가기 위해 펼쳐지는 에피소드들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에 공감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다. 극중 재미를 위한 판단이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전개들이 후반부에 너무 남발된 감이 있지 않나 싶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플롯만 봤을 때, 상당히 평이하고 비슷한 장르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뻔한 전개를 보여주기는 한다. 하지만, 배우들의 살아있는 연기가 경쾌함을 살려주었고 자극적이지 않은 연출과 전개로 따뜻함과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인 점들도 갖췄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 특유의 단점으로 언급되는 신파나 극적인 전개를 위한 작위적인 연출도 없고, 오지랖 캐릭터로 그려지는 '자영'의 모습도 민폐캐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위기 상황을 언제나 영리하게 해결해 나갔다. 이러한 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대중적으로 즐겨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외적인 이슈가 아닌 극의 내용에 좀 더 초점을 맞춰 이 작품을 바라봐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