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기에만 화려한 엉성한 대작 (이정재/박해수/정호연/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2021)
연출: 황동혁 (<남한산성>, <도가니> 연출)
출연: 이정재, 박해수, 정호연, 위하준 등
장르: 스릴러, 서바이벌, 액션
방송 횟수: 9부작
공개일: 2021.09.17
각기 다른 이유로 빚에 허덕이며 벼랑 끝에 놓인 456명의 사람들. 지옥과도 다름 없는 현생을 살아야 하는 이들은 거액의 상금을 타겠다는 일념 하에 목숨을 건 생존게임에 참가한다. 핑크색 수트와 가면을 쓴 의문의 관리자들이 데려온 게임의 세계는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규칙 하에 한 명당 1억에 달하는 목숨 값을 걸고 친숙하지만 섬뜩하기 그지 없는 놀이들을 진행시킨다. 가족으로부터 외면받은 '성기호(이정재)'는 병든 노모를 살리기 위해, '조상우(박해수)'는 투자 실패로 망가진 인생을 되찾기 위해, '새벽(정호연)'은 엄마와 동생과 함깨 살기 위해. 평범치 않은 사연들을 가진 인물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게임에 참가해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위태로운 단계들을 밟아 나간다. 배신과 싸움, 우애와 슬픔이 오가는 서바이벌에서 오로지 한 명만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상금과 함께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
비주얼적인 면에서는 <종이의 집>, 서바이벌 게임에서 내용을 착안한 줄거리는 일본의 <라이어 게임>, <신이 말하는 대로> 등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생존 스릴러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등 한국의 전통 놀이들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과 차별화 된 매력을 가진다. 한국인들에게 친숙하면서도 다소 유치할 법한 놀이들과 총성이 오가는 전쟁터와도 같은 공간의 언밸런스함이 듣도 보도 못한 오묘함을 일으키는 것이다. 특히 손쉽게 사람의 목숨을 갖고 장난을 치는 서바이벌과 비비드한 색감의 놀이터, 관리자들의 핫핑크 색상 수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의 여러 구조물들의 대비는 완전한 부조화를 일으킴과 동시에 극의 잔혹성을 부각시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소재의 참신함과 작품의 매력을 살려낸 배경의 구성 정도를 제외하면 <오징어 게임>에서 호평할 요소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극 초반부만으로도 연상되는 작품이 한 둘이 아닐 정도로 생존 게임을 다룬 작품들의 클리셰를 그대로 따르며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성격까지 지나치게 일반적이다. 공간만 제대로 갖추었을 뿐 매 회 진행하는 게임의 완성도는 촘촘하게 서스펜스를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며 옥의 티도 너무 많다. 단지 자극성을 앞세워 스토리의 빈 공간들을 애써 메우려고 한 흔적이 쉽게 엿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언급할 단점이 너무 많아서 입이 아플 지경이다.
아무리 비현실적 요소가 가미된 드라마라지만, 현실적인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품의 전개 방식이 너무도 거슬린다. 현실적으로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인도로 끌려가 데스 게임을 펼치고, 대부분의 사람이 죽임을 당해 사라지는데 아무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보통 이러한 데스 게임 장르의 작품은 소규모의 인원을 데리고 은폐된 공간에서 게임을 벌이는 탓에 작중 배경에 대한 의구심이 크게 발생하지 않지만,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들을 데려가는 데만 차량 수십 대를 활용하는 대규모 게임이라는 점에서 작품의 부족한 개연성이 훨씬 부각된다.
그리고 홀로 선박에 잠입해 사건을 파헤치려 하는 경찰 '준호'의 시퀀스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들이 빈틈투성이다. 보안과 신뢰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집단이 그의 수상쩍은 행동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결말부에 다다를 때까지 침입자 한 명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이 불가능한 지점이다. 이 밖에 초반부터 흑막 캐릭터로서의 여지를 남기며 뻔한 반전을 선사한 '일남(오영수)' 캐릭터, 재벌급 VIP를 관람자로 대동해 놓고 달고나 뽑기와 구슬치기 같은 시시한 게임을 진행하는 전개 또한 극의 허술함을 유발한다.
본작이 서바이벌 액션 스릴러 장르의 시리즈인 터라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들의 비중이 적을 뿐더러 활약상 또한 부족해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장르적 한계 속에서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의 여부가 극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돌파구가 될 수 있는데, <오징어 게임>의 경우 탁월하지는 않지만 제법 돋보이는 소수의 여성 캐릭터를 구현한다.
다른 남성 캐릭터들의 분량에 비해 관계성이나 비중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1-2회 정도의 등장만으로 신선한 임팩트를 끈 역할들이 있다. 바로 '새벽'역의 배우 '정호연'과 '지영'역의 배우 '이유미'. 두 사람의 관계는 세번째 게임인 줄다리기에서부터 등장하여 구슬치기를 끝으로 짧게 끝나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단연 돋보인다. 특히 <박화영>과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미친 연기력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이유미'는 신스틸러로서의 존재감이 대단하다. 신파로 점철되었던 구슬게임 회차에서의 인물들의 사연팔이는 지루함을 유발했으나 담백한 대화 형태로 해탈한 감정과 함께 이뤄진 새벽과 지영의 마지막 게임만큼은 흔한 감상을 남기지 않았다. <오징어 게임>을 통해 연기 데뷔를 치른 모델 출신 '정호연'은 대사를 소화할 때의 어색함이 감돌긴 했지만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과 날선 표정 연기로 '새벽'이라는 인물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뚜렷한 과거 회상이나 눈물 쏟는 장면이 없었음에도 둘 중 한 사람 밖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비극을 잔잔한 울림과 함께 살려낸 두 여성 캐릭터의 짧은 인연이 극 전체를 통틀어 제일 짙은 인상을 남겼다.
극이 단순히 피로 물든 생존 싸움이 되거나 혹은 다 같이 게임의 승리를 위해 힘을 합치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된다는 등의 뻔한 에피소드 구조를 취하지 않도록 작품을 신명나게 흔들어준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며 독한 생존력을 보여준 '한미녀'. <도가니>, <SKY캐슬>로 얼굴을 알렸던 배우 '김주령'은 가장 격정적인 감정 상태의 캐릭터를 열연하며 배신과 반칙, 복수가 함께 오가는 작품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을 구현한다. 모든 인물들이 생존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는 '미녀'의 치열한 생존 의지는 가히 압도적이다. 다소 비호감으로 그려질 법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작품이 심각한 방향으로 흘려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징어 게임>의 결정적인 흠은 작품을 통해 감독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생존과 돈을 위해 무슨 짓이던 벌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인지, 사회로부터 외면 받은 사람들이 평등한 기회를 통해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자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극적인 단순 오락 액션 드라마를 만들려는 의도 하에 제작된 작품으로만 간주하기도 어렵다. 전자의 지적을 뒷받침하자면, 매회 쉽게 죽어버리는 수많은 인물들로 인해 어떠한 캐릭터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여 그들로부터 뚜렷한 메시지를 건지기 힘들다. 후자의 경우에는 루즈한 전개와 지긋지긋한 K-신파, 그리고 디테일하지 못한 게임의 구성 때문에 오락적인 재미를 찾기도 어렵기 때문. 차라리 2시간 정도 러닝타임의 킬링타임용 영화로 제작되었다면, 수많은 문제점들 중 일부분은 해결됐을 수도 있다고 본다. 좋은 소재를 갖고도 스토리의 재미를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이 궁극적인 아쉬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왜 '오징어 게임'이어야 했을까? 제목에 담긴 의도나 장치들이 단 하나도 와닿지 않는다.
(+)
이렇게 길게 적었음에도 아직도 적지 못한 단점들이 남았다. 자극적인 폭력성을 앞세워 화제성을 확보하고 인기를 얻는데는 성공했지만, 시청률만으로 작품성을 높이 평가할 수 없듯 <오징어 게임>의 흥행은 고깝게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