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 Anarchy>, 아찔한 장난 그리고 일상의 숨구멍
17년 드라마 인생에 첫 스웨덴 드라마다. 꽤나 자극적인 소재로 시작해 가벼운 로코 드라마일 것이라 넘겨짚을 수 있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사회현상이나 심리적인 문제와 같은 진지한 이슈들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래도 전체적인 톤은 가벼운 편이며, 회차별 러닝타임이 짧고 8부작이라 부담없이 감상할 수 있다. 스토리에 대한 혹평이 크진 않지만, 첫화에서 남자주인공 '막스'가 여자주인공 '소피'의 사진을 불법촬영하는 장면에서 한국 시청자 절반은 떨어져 나갔을 거라 예상한다... 그래도 두 주인공의 비주얼로 인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스웨덴 드라마임에도 은근한 마니아층을 형성한 듯 하다.
주인공 '소피(이다 엥볼)'은 스톡홀롬의 한 출판사에 혁신 사업 컨설턴트로 부임한 유능한 여성이다. 출판사의 디지털화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계획들을 추진하며 똑부러지는 일처리 능력을 보여주는데, 부임 초기부터 드릴 소리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비정규직 IT 기사 '막스(비욘 모스텐)'과 부딪히게 된다. '소피'에게 크게 한 소리를 들은 '막스'는 화가 난 상태로 있다가 우연히 야근 중인 '소피'의 은밀한 사생활을 목격하며 사진을 찍어 협박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정말이지, 여기까지만 읽으면 이 드라마 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 '막스'는 '소피'와 점심을 한 번 먹는 것으로 사진을 지워주는데, 이번에는 '소피'가 핸드폰을 미끼로 '막스'에게 자신이 시키는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하면서 핑퐁 게임과도 같은 둘만의 아슬한 장난이 시작된다. '소피'의 입생로랑 립스틱을 매개체로 두 사람을 그것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아찔한 행동을 시키고, 아슬아슬하게 그 행동들을 수행함으로써 짜릿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게 되고, 결국 불륜 비스무리한 단계까지 발전한다...
사실 두 사람이 이렇게 위험한 장난을 통해 가까워진 이유는 심리적인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소피'는 능력있는 인물이지만, 위기의 출판사를 구해내기 위해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가치관이 맞지 않는 아나키스트 '아버지'와 남편 간의 갈등으로 인해 가정에서마저 숨을 돌릴 틈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막스'는 비정규직 IT 기사로 불안정한 삶을 살다가 운좋게 정규직 자리를 얻었으나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골칫거리 취급만 당하며 서러움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소피'가 떠났을 때, 터져나온 설움에서 '막스'가 가진 외로움과 불안의 정서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누구보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두 남녀였고, 뭔가 이상한 방식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이 취하는 행동들은 제3자가 봤을 때, 미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에겐 지겨운 일상의 하나뿐인 돌파구였고, 하나의 시원한 숨구멍이었다. 어딘가에 항상 불안정하게 얽메여 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잠깐의 일탈을 즐겼을 때, 뿜어져 나오는 자유로움의 에너지는 꽤나 강렬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이 작품에서 말하는 '아나키 상태' 그 자체를 의미했다.)
'소피'와 '막스'의 로맨스 못지 않게 이 작품의 흥미로운 파트는 바로 인물들의 가치관 대립이다. 스웨덴의 정서와 사회상이 반영된 작품이라 나올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소피'의 남편을 비롯한 젊은 인물들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그려지는 반면, '소피'의 아버지는 디지털화와 우민화 정책에 반대하며 자본주의를 경멸하는 '아나키스트'이다. '소피'의 남편과 아버지가 벌이는 갈등은 단순히 인물 간의 갈등이라기보단 스웨덴의 사회 계층 간 갈등으로 확대해서 해석할 수 있는데, 디지털화 되어가는 젊은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정부를 믿지못하는 노인 계층과 변화되어 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들을 비난하는 청년 계층의 완강한 대립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좋다고 볼 수 없었는데, 어찌 됐건 '나'의 가치관은 '나'만의 가치관일 뿐이다. 자기만의 세상을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입히려고 하는 순간 갈등은 자연스럽게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내 가치관이 소중한 줄 알면, 남의 가치관도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경멸하며 손녀딸의 생일파티를 망쳐놓은 할아버지도 잘못이 있지만, 그러한 할아버지를 경계하고 딸에게 자신의 가치관만이 옳다고 하는 '소피'의 남편 역시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결말부에서 '소피'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고, 런던으로 떠날 것을 제안하는 그의 태도 역시 자신의 가치관만을 주장하는 '소피'의 아버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권위주의로 똘똘 뭉쳐있는 그의 모습에 '소피'도 정이 다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제법 짧은 드라마임에도, 상당히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가 많다.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일 수 있지만,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따른 출판업계의 위기와 그에 대처해 나가는 모습들을 꽤나 흥미롭게 그려냈다. 구식 스타일로 밀고 나가는 출판업계의 기성 세대와 페미니스트 직원 간의 의견 대립부터 스트리밍 문화에 따른 문학의 상업화와 문학의 예술적 가치 간의 충돌 문제까지.
결과적으로 '소피'의 난동(?)으로 스트리밍 플랫폼으로부터 출판사 인수를 거절당하며 예술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출판사로 남게 되는 애매한 결말로 마무리되었는데, 상업화에 굴복하지 않고 문학성의 가치를 지키는 출판업계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던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과도한 해석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면 결말이 너무 모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 같다.
<러브 앤 아나키>의 유입 요인 8할은 남자 주인공 '막스' 역할을 맡은 배우 '비욘 모스텐'일 것 같다. 이 작품이 데뷔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떠오르는 넷플릭스 남주상이 될 듯. 물론, 비주얼 때문에 끌려 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더라도, 쉽게 접할 기회가 없었던 스웨덴의 분위기와 감성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매력 있는 신선한 작품일 것이다. 스웨덴 배경을 겉핥기 하는 느낌이 아니라 스웨덴의 계층, 사회상, 업무 환경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조금은 알아가는 느낌이었다.
다만, 몇몇 이해할 수 없는 감정선이나 사고방식들이 번번이 튀어나와서 마냥 좋게만 본 드라마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어정쩡한 결말이 아쉬웠는데 시즌2를 노린 의도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