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도 괜찮아. 이번 생은 처음이니까. (스포일러 있음)
"아비규환".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을 이르는 말로, 여러 사람이 비참한 지경에 처해 울부짖는 상황을 묘사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주인공 '토일(정수정)'이 현재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 자체다. '아비규환'에서 파생된 극의 제목 '애비규환'처럼 '토일'의 주변에 있는 3명의 '애비'들은 '토일'에게 정신적인 혼란과 불안,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 '새아빠(최덕문)'은 15년을 같이 살아도 여전히 어색하고, 힘들게 대구까지 가 찾아나선 '친아빠(이해영)'은 실망만 안겨다준다. 친아빠를 찾고 나니 설상가상으로,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예비 아빠이자 남친 '호훈(신재휘)'까지 갑자기 사라지게 되면서 '토일'은 그야말로 극강의 '애비규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독특한 제목이지만, 영화 내용을 함축하는 키워드로는 최고의 선택이였다고 본다.
주인공 '토일'은 스물둘 대학생으로, 과외를 해주던 남학생 '호훈'과 콘돔 없이 하룻밤을 보낸 결과 덜컥 아이를 임신해버린다. 이 사실을 임신 5개월 차가 되어서야 부모에게 통보 식으로 전달하고, '토일'의 극단적인 행보에 부모는 멘붕에 이른다. 부모가 자신을 다그치고, 지지해주지 않자 '토일'은 도대체 내가 누굴 닮아서 이러는지 직접 확인하겠다며 7살 때 헤어진 친아빠를 찾아 무작정 대구로 떠나게 되고, 여기서부터 대책없는 '토일'의 아빠찾아 삼만리가 시작된다. 일주일 내내 허탕만 치다가 서울로 돌아가기 직전, 친아빠를 찾아 내지만 막상 친아빠와 재회를 하니 설움만 복받쳐 오르고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한다.
별 소득 없이 실망감만 안은 채'토일'은 서울로 돌아오게 되는데, 때마침 아무도 모르게 잠수를 타버린 남친 '호훈'이 잠수를 타버리면서 구아빠+친아빠+엄마와 함께 '호훈'을 찾아다니는 또 한 번의 환장할 여정이 시작된다. 친아빠와 남친을 찾아다니는 '토일'의 시점에서 우왕좌왕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마치 아노미 상태에 있는 듯한 영화의 갈피를 못잡는 전개가 이 작품의 매력이다.
극중 '토일'의 가장 큰 고민은 자신이 계획한 미래가 송두리째 망가져버릴 것 같다는 불안, 그리고 이혼과 재혼으로 평범치 않은 가정환경을 만든 자신의 부모처럼 될 수도 있다는 미래의 가정을 떨쳐내고픈 것이었다.
'토일'의 정신적인 혼란이 가중된 상황에서 생각보다 결론은 쉬운 방향으로 도달한다. 망해도 괜찮다는 것. 망해도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다는 것. 단순한 것 같지만, 꽤나 정신을 번쩍 들 게 해주는 하나의 메시지였다. 이혼과 재혼으로 인해 가족에게서 상처를 받았지만, 같이 부딪히고 갈등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겪으며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폭망의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충분히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날 수 있다. 중간에 무언가가 어긋나 버려도, 어긋난 상태로도 잘만 굴러가는 게 인생이기 때문에 지레 겁먹고 망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잠식되지 말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주지 않았나 싶다.
사실 '토일'의 걱정처럼 '토일'과 '호훈'의 결혼은 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이 또한 '토일'의 선택이고 정말 망하게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망할 수도 있지만, 일단 내 선택이니 밀고 나가 보자, 혹시나 망하더라도, 망한 상태에서라도 잘 살아보자.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애비규환'의 가장 큰 장점은 쓸데없는 눈물 쏟기를 위한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갈등 요소는 여타 드라마 부럽지 않게 많이 집어 넣었지만, 극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간다. 그럼에도 충분한 공감을 자아내며 코믹함과 감동 코드를 소소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며 뻔한 한국 가족 영화에서 탈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온 힘을 다해 싸우다가도, 위기의 순간 다 함께 힘을 모으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왁자지껄 웃으며 하루를 보내지만, 또다시 어김없이 으르렁 대는 순간이 찾아온다. '애비규환'은 완전한 가족의 행복의 닫힌 결말을 그리지 않는다. 어딘가 항상 어설프고,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고,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장면들을 보여주는데, 사실 현실 가족의 모습이 이렇다. 뭐, 그렇게까지 눈물 콧물 빼고 극단적으로 슬픈 일도 잘 일어나지 않고, 해피엔딩 마냥 완전무결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극히 드물다. 이 2가지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 작품에 소소한 공감을 느끼고, 재밌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 같고, 현실 가족과 같은 모습에 편안함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주연 영화에서 무려 임산부 역할을 소화한 '정수정'의 캐릭터 변신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보다. 독립영화지만, 원톱 주연이고 그동안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캐릭터와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는 역할이라 여러모로 도전적인 작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배우 '정수정'의 연기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은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 원톱 주연 배우로서의 존재감과 연기력이 출중했고, 주인공으로 한 편의 영화를 이끌고 나가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동안 주로 차갑고 시니컬한 역할에 갇혀 있던 틀에서 벗어나 때론 귀엽고 친근하지만, 때론 진지하고 감정에 솔직하며, 똑부러지고 차갑기도 한 입체적인 캐릭터를 부족함 없이 연기해냈다.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준 조연 배우들과의 티키타카 역시 상당히 좋았다.
사실 배우 '정수정'으로서 그동안 보여준 모습들은 비슷한 성격의 역할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 영화를 계기로 확실히 성장했으며 색깔 있는 배우로 거듭나가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망했다." 사실 팩트로 따지고 보면, 망했다라고 표현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일상에서 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다. 정말 망했다기보다는, 나의 선택으로 인해 내 미래의 무언가가 망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실제로 망함의 순간이 닥치기 전에 일종의 방어 기제로서 입밖으로 내뱉는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우리가 '망했다'라고 말하는 순간마다 우리가 진짜로 망했다면, 아마 우린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망해도 괜찮다는 말은 해주지 않는다. 안 망했다고 맘에도 없는 위로를 해주거나, 망하지 않도록 조언이랍시고 불편한 한마디를 끼얹는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 우리 인생사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망해도 괜찮다는 속편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의 막중한 부담감이 줄어들고 개썅 마이웨이를 마음놓고 시전할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이럴 때 결과가 좋은 경우도 은근히 많다.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서 망해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토일'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스스로에게 망해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며 부담을 내려놓고 발 닿는대로 나가보자는 메시지를 전해준 것 같다. 개인적으로 주변 사람 그 누구보다 '망한 것 같다'라는 말을 달고 사는 나에게 이 말을 가장 해주고 싶었다. "망해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