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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린 Jan 07. 2016

정유정의 소설<7년의 밤>을 읽고

사건의 fact보다 '왜 그랬을까'를 재조명하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던 책 표지, 하지만 다읽고 나니 세령호의 단면을 보여준다


무려 400쪽이 넘는 소설에 도전했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7년의 밤>. 처음에는 두께때문에 지레 겁을 먹은 건지 읽기 꽤 어려웠다. 책 앞머리에 나온 지도를 참고하면서 타임슬립을 하며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통에, 100쪽을 넘겨 읽었는데도 아직 소설의 큰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무언가 엄청난 사건을 다룬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추리소설인지 복수극인지 스릴러인지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장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범인을 밝혀가는 과정이라면 추리소설이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상대를 쓰러뜨릴 묘안을 찾는다면 복수극이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음산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을 정도라면 스릴러일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스릴러였다. 종잡을 수 없는 것 같은 줄거리는 책을 150쪽 이상 읽어나가자 잡히기 시작했다. 놀랄 만큼 흡입력 있는 소설이었다. 실화를 다룬 게 아닐까 착각을 할만큼 줄거리는 탄탄했고, 범인이 누군지 알면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평소 추리소설이나 <그것이 알고싶다>와 같은 사건 수사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나에겐, 매우 신선한 충격의 소설이었다. 주인공 서원이와 살인범이 된 아버지 최현수, 그들을 쫓는 죽은 소녀의 아버지 오영제의 이야기. 그리고 서원이의 조력자이자 사건의 전모를 알고 진실을 밝혀낸 아저씨 승환까지. 이들은 서로 얽히고 얽혀 사건을 더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아니, 다 읽고나니 사실 사건 자체는 크고 복잡하지 않다. 최현수는 음주운전으로 한 소녀를 죽였고, 두려움에 호수에 시체를 유기한다. 승환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며, 오영제는 딸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경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최현수를 쫓는다.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소설은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전개된다. 그만큼 신문 사회면에서 간혹 보기도 했던 살인사건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평범한 살인사건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사건이 매우 특이하거나 트릭이 많은 미스터리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살인사건에서 살인범은 매우 질타받는 역할이지만, 책을 보는 내내 나는 그에게 도리어 연민을 느꼈다.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의 가정환경, 부부생활, 사회적 위치, 가치관을 봤을 때 그는 참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 자신을 잃어버린 삶이었다. 또, 무서운 집착으로 살인범을 찾아내고자 하는 오영제도 그냥 '나쁜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그의 삶의 가치관과 행복의 잣대, 그의 시선과 생각을 따라가면서 소설을 읽으니 과연 그가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고, 또 그게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서 그를 이해한다는 건 공감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왜 그런 사고를 갖게 되었는지 의문이 풀린다는 이야기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선 그럴 수 있겠다, 뭐 그 정도.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웠다. 자기 전 누워서 책을 보다 잠들기가 조금 무서울 정도랄까. 영화를 보는 것 같아 잠들려고 누우면 자꾸 소설 속 장면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마지막 사흘 정도는 틈나는대로 소설에 빠져 하루에 몇 십쪽씩 단숨에 읽어나갔다.



이 책을 읽고나서는 앞으로 내가 책을 고르는데 있어서의 방향성도 달라졌다. 그 전엔 줄거리가 탄탄한 소설, 베스트셀러라고 손꼽히는 소설을 위주로 골랐다면, 이제는 사람의 내면에 주목하는 소설을 읽고싶다.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의 삶과 사고를 간접경험하는 것이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이다. 다음 읽게 될 소설도 그 사람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책을 읽고 싶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이럴 수도 있겠구나, 자꾸만 내 생각을 끊이지 않고 물음표를 띄워줄 수 있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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