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린 Jun 03. 2018

난 정말 회사가 그리웠어요.

세계여행을 하면서도 직장생활이 생각났던 이유

그리움의 대상엔 참 여러가지가 있지만, 지난 1년반동안 내 그리움의 대상은 다름아닌 <직장>이었다. 

직장생활을 때려치고 다들 '욜로(YOLO)'를 찾는 마당에, 오히려 직장이 그리웠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난 정말 그랬다. 그것도 엄청.




@Myanmar

지난 2016년 겨울,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472일간의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시작할 즈음, 나는 갑갑한 직장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에서 자유를 누릴 생각에 잔뜩 들떠있었다.

이번 여행에서야말로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마음껏 읽고 생각하고 쓰며 오겠다는 당찬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솔직히, 정말 좋았다. 전자책이지만 읽을 책들은 차고 넘쳤고, 다이어리 하나만 들고 다니면 어디를 가던 그곳은 내가 마음껏 공상을 펼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나만의 마음집이 되었다.


그러다 한두 달쯤 지났을까. 그러니까 아직 여행자가 아니라 직장인의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회사를 그만둔지는 거의 100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불현듯, 회사가 그리워졌다. 얼마전만 해도 직장은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여행만을 꿈꿔왔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겨우 100일만에 직장 생활을 다시 그리워하고 있었다.



말도 안돼.

남편도, 그리고 나도 똑같이 말했다. 나조차도 내가 이해가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그것도 그렇게 꿈꾸던 세계여행을 하면서?



언젠가 끝나게 될 세계여행. 이미 시작했지만 언젠가 끝나게 될 여행.

나는 여행 그 이후에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일년 여간의 공백기 끝에 이직을 해야하는 나로서,

여행하는 기간동안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건지 구체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내가 나를 먼저 이해하고 설득시켜야 했다.


대체 내가 그리워하는 게 정확히 뭔지.


@Udaipur, India

생각이란 건 끝도 없었다. 생전 처음 든 생각이니 나조차 당혹스러웠다. 물음이 정확하지 않았으니 정답도 딱 떨어질 리 없었다. 그렇게 마음 한 켠에 물음표 꼬리를 접어두고, 남편과 대화하면서 당장 오늘 어디서 뭐 먹고 뭐할지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물음이 나의 무의식 어딘가로 옮겨갈 때쯤, 혼자 다이어리를 쓰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내 일상에서 가장 중요했던 목표와 계획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여행을 시작하면서는 시간대별로 표가 그려진 <플래너> 형태의 다이어리 대신, 아무런 줄이나 표시가 없는 <무지> 형태의 다이어리를 들고 다녔다. 학교생활, 직장생활처럼 나의 하루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이 없다보니, 짜투리 시간을 확보할 필요도 없었고 자기계발 같은 것들은 더더욱 할 필요가 없었다. 이 긴 여행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많이 생각하고 느끼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나누는 것이었다.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걸 보고 감동했는지, 내 기분이 어땠고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런 것들이 내 다이어리에서, 그리고 내 하루에서 가장 중요했다.


겨우 메모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인데, 많이 어색했다.

나의 하루를 정량으로 표시하고 재며 내 목표 대비 얼마나 열심히 하루를 살아왔는지 체크해 왔는데,

이젠 그렇게 수치화된 하루 대신 중요한 건, 오늘 지금 이 순간 나의 기분, 나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하루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사실 그렇게 회사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주말 딱 이틀 쉬고 다시 회사에 출근하는 건 너무나 아쉬웠지만, 휴일이라도 끼어 3일을 쉬고나면 다시 회사를 갈 수 있는 힘이 났고, 일주일 휴가라도 보냈다 하면 어느새 직장 스트레스는 다 잊어버리고 다시 회사를 가고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나는 다만, 매일이 반복되는 그 권태로움에 취했던 것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다는 '직장인 사춘기'같은 게 왔던 것 같다.

그렇게 싫진 않았지만 괜히 모든 게 다 싫어지는 것 같은 것.


생각해보면, 나는 오히려 매일매일 나를 힘나게 하는 그런 일상이 그리웠다.

일이 힘들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리프레쉬하고나면 '오늘 하루 다시 열심히 일해보자!' 하며 나를 다독였던 그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던 것 같다.


@Estonia


이렇게 나를 들여다보면서 확실히 느낀건, 나는 앞으로 또 권태로움에 취해 직장생활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분명한 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고, 아무리 좋은 것도 매일 갖고 있으면 그 소중함을 모르는 법이라는 것. 아무리 좋은 직장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일한다 한들, 매일이 천국처럼 좋다며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을까ㅡ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의 직장'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건 아닐거다ㅡ 나는 이게 분명 사람의 차이, 마인드의 차이에서 온다고 믿는다. 세계여행을 마치고 한달째, 어느덧 새로운 직장에 입사한 지금, 나는 다짐해본다.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직장, 설레는 이 기분, 열심히 하겠다는 이 초심을 절대 잊지 말자고. 아니 앞으로 분명 닥치게 될 <권태로움>이 나를 덮칠지라도, 약해지지 말자고. 다시 이겨내자고.


매거진의 이전글 딱 한줌의 여유는 갖고 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