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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린 Jun 17. 2018

지금 당장 친구에게 엽서를 써보자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더불어 두터워진 인간관계는 덤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하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쓴 적이 있다.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주 만났던 친구들, 혹은 1년에 한두 번 만나지만 그래도 공백이 어색하지 않을만큼 좋은 친구들. 나는 여행하면서 문득 그들을 그리워했다. 내겐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는 바쁜 일상 속에서 나 먹고 살기 바빠, 이렇게 ‘내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을 가졌던가. 아니었다. 분명 그들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은 같았지만, 이렇게 내 안에 그들의 자리가 실감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여행을 마무리할 즈음, 나는 문득 나의 이런 마음을 친구에게 전하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가 만나면 또 시덥잖은 말만 늘어놓느라 진심을 전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카카오톡이나 SNS로 전하기엔 너무 가벼웠고, 편지를 쓰기엔 어색했다. 여행지의 느낌을 그대로 담되, 딱 한 장의 공간에 내가 하고싶은 말들을 채워넣을 수 있는 엽서가 제격이었다.


공항 라운지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비오는 날 숙소에서,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새벽시간. 나는 여유롭게 앉아 몇 자 적어갔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 여행지에서 엽서 한 장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막상 펜을 드니 조금 진지해졌다.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던 적이 얼마만이던가. 같은 반 친구에게도, 바로 옆 짝꿍에게도 쪽지를 쓰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때가 있었다. 말로는 절대 전하지 못하지만 편지로는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편지 쓰는 걸 참 좋아했던 아이였다. 거의 20년 만에 다시 엽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불현듯 행복해졌다. 간단하게 쓰려고 시작했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면 엽서의 그 좁은 공간이 항상 모자랐다. 차라리 편지 한 장을 써야했나 싶을 정도로 아쉬웠지만, 한정된 공간안에 나의 마음을 꾹꾹 눌러담기위해 나는 엽서를 쓰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시간 제한 없이 용량 제한 없이 하고싶은 말을 언제든 할 수 있는 지금의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와 달리,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 안에 내 마음을 담는 경험은 새삼 신선하게까지 느껴졌다. 50원짜리 문자 한 통을 보낼 때에도 그렇게 단어를 썼다 지웠다 하며 할말을 가득 채워 보냈던 귀여운 추억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엽서 한 장을 쓰기 시작했을 뿐인데, 이렇게 행복에 젖을 수 있다니.



미국 서부 / 페루 와라즈에서 샀던 엽서들


엽서를 쓰는 그 시간동안만큼은 온전히 내 엽서를 받을 친구만 생각할 수 있었다. 주변의 그 어떤 소음도, 현재 나의 상황도 모두 잊은 채, 오로지 그녀 혹은 그녀와 함께 있던 나의 순간들만이 있었고, 나는 그 기억들을 가만가만 만졌다. 정말이지 행복한 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엽서를 쓰는 그 순간은, 내가 발견한 새로운 행복이었고 소위 말하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엽서를 쓰면서 나는 철없던 15살로 돌아가기도 하고, 미래 걱정에 고민이 많던 20대 초반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지금과는 다른 나의 과거를 함께 했던 친구, 내가 힘들었을 때 들었던 말 한마디, 만날 때마다 받았던 기분 좋은 에너지들이 그대로 생각났다.


우리가 처음 친구가 되었던 순간 우린 모두 철없는 소녀들이었지만, 지금은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그야말로 ‘미생(未生)’이었다. 분명 십여 년을 더 살아왔는데도,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나이가 들수록 더 불안해하고 힘들어했다. 그건 비단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민이었다. 나는 지금도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혹은 미래를 준비하며 두려워하고 있을, 또다른 ‘나’를 응원해주고 싶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너는 원래 밝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잊지말라고, 그리고 우린 다 잘될거라고. 나의 작은 한마디가 그녀의 퍽퍽한 삶에 한 줄기 햇볕이 되길 바랐다. 그녀의 지금을 응원해주고 싶었고, 내가 지금 그녀와 함께라면 꼭 해주고 싶은 말, 어쩌면 그녀가 듣고 싶었던ㅡ어쩌면 아무도 해주지 않았을ㅡ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면서 스스로 위로받았다. 그들에게 해주는 말은 곧 나에게 해주는 말과 같았다. 비록 열두 시간이나 시차가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나는 엽서로나마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엽서를 받은 친구들의 카톡 메시지


한국에 있는 그들에게 내 엽서가 닿기까지는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엽서를 받은 친구들로부터 엽서를 받았다는 메시지들이 왔다. 나는 그저 덤덤히 내가 해주고 싶었던 말을 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 엽서를 받고 울컥했다는 반응이었다. 그저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랐는데 그들에게까지 온기가 전달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내게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들이 지금도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깨닫길 바랐다. 우리는 지금도 빛나고 있다. 다만 스스로의 빛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보기엔 그녀는 굉장히 반짝거리는데, 정작 스스로가 희미하게 끔뻑거리는 불빛 정도로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나의 엽서가 그들의 빛을, 그리고 나 자신의 빛을 볼 수 있는 작은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종종 엽서를 보내야겠다. 가까이 있어도 차마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나의 사람들에게.


공감이란 타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즉 이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 스스로를 외롭게 한다. 공감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와 타인, 나와 세상과의 다리이며, 그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내 안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생각의 깊이가 없고 고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정만 있을 뿐이지, 공감을 할 능력은 없다. 자신만의 고민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공감을 할 수 있고,우리가 사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

-유수연, <인생독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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