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쥔 주먹을 펴고
조연출 시절, 어린이들이 주출연자인 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오은영선생님이 특별출연해 아이들과 상담하는 내용의 촬영본을 편집하던 중이었는데 혼자 편집실에서 찔찔 울었던 날이 있었다. 정확히는 <작은 실수에도 곧장 울어버리는 아이와의 상담 장면>이었다. 오은영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틀려도 돼. 과정이 중요한 거야. 최선을 다하고 그걸로 뿌듯해하면 돼.
다른 사람 말고 네가 가장 중요한 거야."
그 말들이 마치 나한테 하는 말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나로 살기 시작한 유치원시절부터 나는 무엇이든 잘하기 위해 무진장 아등바등하는 아이였다. 공부나 노래 부르기, 글짓기, 그림 그리기 아니면 친구들에게 인기 많기 같은 것까지도 그랬다. 어른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날이면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한심할 만큼 모든 것을 잘하기 위해 바들바들 사는 사람인지를 떠올리게 하는 한 가지 순간이 있다.
중딩 때 즈음 제주도에서 우리 자매랑 아빠 친구 딸 자매 이렇게 넷이서 바나나보트를 탔을 때의 일이다. 원래 바나나보트라는 게 그렇듯 우리 보트의 사장님도 짜릿한 한방의 재미를 위해 운행이 끝날 때쯤 일부러 급하게 각도를 꺾어 우리 모두를 물에 빠뜨렸다. 잠깐 어푸어푸 물에 빠진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제 저까지 갔냐 싶을 만큼 저 - 멀리 조그맣게 세명 모두가 물에 둥둥 떠다니며 깔깔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나는? 나 혼자 뒤집어진 바나나보트의 손잡이를 꼭 붙잡고 눈을 질끈 감고 보트에 딱 붙어 있었던 것이다. 보트를 타고 있었다면 저기 멀리로 튕겨져 나가는 게 자연스러운, 심지어 그것이 재미의 하이라이트인 이 바나나보트 타기라는 행위에서 나는 나 홀로 뒤집힌 보트의 손잡이를 바들바들 붙잡고 있는 소녀였다. 거의 팔에 쥐가 날 정도로 손잡이를 놓지 않고 붙어있는 그 바들바들한 태도가 바로 기본적으로 내가 삶을 대하고 있는 태도 같았다. 공부나 일이든, 인간관계든, 연애든. 심지어 겨우 여행에서 길 찾기 같은 것조차도. 잘 못하면 끝장이란 생각으로 바들바들 어떻게든 악착같이 잘해야만 해야 한다고 되뇌는 나의 모습. 이제 그런 생각조차 너무 익숙한 삶의 일부라 별다른 압박감도 아닐 만큼 디폴트값이 된 채로 나는 그렇게 세상을 살아왔다.
언젠가 엄마와 둘이 갔던 호주 여행에서 엄마는 '나는 다시 태어나면 금발의 미국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했다. 어쩌다 그런 묘한 이야기를 했을까? 난 다시 태어난다면 히피로 태어나고 싶다. 옷도 내 맘대로 입고 잠도 아무 데서나 발 길 가는 대로 잔다든가 머리를 엄청 특이하게 꼬았다든가 예쁘지도 않은 타투를 엄청나게 했다든가 한, 히피. 나는 자유로운 것은 너무나 좋은 것이라고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면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 반대로 내가 너무나 바들바들거리며 모든 것을 '잘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정말 히피로 태어나고 싶다.
그 촬영본에서 오은영 선생님은 상담 마지막에 '우리가 이런 이야길 했다고 해서 네가 갑자기 바뀌진 않아.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못하거든.' 하셨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매일 아침 이렇게 말해주는 알람시계를 선물해 줬으면 좋겠다.
“오늘 잘 못해도 돼. 왕창 틀려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