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닌 내가 가치있다 여기는 삶

휴스턴댁 S

by 이영란

남편이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일 년이 지난 2002년 여름, 그는 결혼을 하고 오겠다며 한국으로 날아갔고, 두 주 만에 예쁜 색시를 데리고 휴스턴으로 돌아왔다.

앞서 말했듯 남편이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남편과 나는 교제를 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리 가볍지 않은 둘 사이의 역사가 가늘고 길게 있어는 왔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날, 교회 중고등부에서 샤프한 외모에 공부도 잘한다는 재수생 오빠를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일(그때 그 멋진 오빠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그 오빠의 아버지가 나를 초등학교때부터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두셨다는 사실을 듣게 된 일(아버님은 지금도 며느리를 보실 때마다 그렇게 뿌듯하실 수가 없다), 미국에 가기 전 오빠가 한번 고백을 했으나 내가 당차게 거절했던 일과 같은 에피소드 같은? 말하자면 그냥 타이밍이 여러 번 엇갈린 썸남 정도였던 사람과 그렇게 급속도로 관계가 발전하게 된 건 때가 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 사이에 빌미가 되어준 도화선이 있었다면 그건 나의 대학 동기 S였다.


남편과 같은 학기에 휴스턴의 라이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나의 대학 동기 여자친구가 있었으니 그 친구가 S이다. '너희 과 친구 중에 S가 있지? 나랑 지금 휴스턴에 같이 와 있어. 세상 참 좁지?'라며 MSN 메신저로 남편이 말을 걸어온 것이 결정적 스파크의 시작이다. 같이 짐 부치고 함께 미국 생활을 시작한 박사동기가 한국에서 데려올 색시가 자기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던 S. 우리는 그런 인연으로 각자의 신혼과 출산, 연애와 결혼까지 삶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고단한 시간을 공유했다. 나는 요리 실습을 하는 족족 배고픈 유학생 친구를 마루타 삼아 먹여댔고, 친구는 친구대로 서글프고 빡빡한 유학생활에서의 어려움을 내게 토로했다.


남편과 S는 비슷한 시기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는 유펜에서 포스닥(post-doc, 박사 후 연구과정)을 하게 되어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둘째를 낳았고, 그사이 S도 결혼을 하고 존스홉킨스 대학에 tenure-track으로 들어갔다. 테뉴어트랙은 정년보장(tenure)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교수임용 경로로, 우리나라로 치면 정교수가 되기 전 조교수 정도라 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보통 6년) 연구실적이 좋아 테뉴어를 받으면 정교수가 되고, 기준에 못 미치면 그 학교를 떠나 다른 대학에서 다시 처음부터 트랙을 시작해야 한다. 존스홉킨스 같은 명문대에서, 포스닥 경력도 짧은 자신같은 유학생에게 덜컥 테뉴어트랙을 제안했다는 사실에(자기가 지원해놓고는) 깜짝 놀란 S는 그날 밤 곧장 내게 장거리전화를 했다. 내 친구가 미국의 명문대로부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자랑스러워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그날 밤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소 부담스러워하던 S의 머뭇거림도 잠시, 씩씩하고 당찬 S는 바로 다음날 그 제안을 수락했다.

이젠 tenure를 받기 위해 열심히 연구에 매진해야 타임. 그런데 존스홉킨스에서의 S의 행보는 다소 놀랍고 남달랐다. S는 미국 최고 수준의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미국 최고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받으며 두 딸을 연이어 낳았고, 연구는 언제 하나 싶게 육아를 이유로 휴직을 밥 먹듯 했다. 사실 나도 필라델피아로 이사한 후 둘째를 곧장 임신하고 출산하느라 S와 연락이 뜸해 이런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가, 테뉴어 심사에 똑 떨어졌다면서 오랜만에 연락을 준 S의 전화를 받고서야 그간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마치 S의 친정엄마라도 된 듯 나는 S가 출산과 육아로 연구에 매진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고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S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후 S는, 원정출산 나왔다 다시 귀국하는 부잣집 며느리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남편의 고향인 휴스턴으로 돌아갔다. 아이들 키우기 가장 좋은 동네에, 아이들 키우기 가장 좋은 집을 공들여 골라 정착한 후, S는 지금까지 휴스턴대 수학과에서 학부생 강의를 하는 파트타임 강사로 살며 두 딸을 정성껏 키우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격이며 스타일이며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는 너무도 달라 존재 자체가 항상 새로움과 충격이었던 S. 운명적으로 미국에서 다시 만나 수년간 가까이 지내며 내가 S에게 크게 배운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세상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가치롭게 여기는 삶을 사는 것에 자신의 전부를 건다는 것. S는 강의도 정말 잘하고, 수학분야의 연구능력도 출중한 친구이다. 그러나 S에게는 평생 교직에 계셨던 어머니가 있었고, 내 아이들만큼은 일하는 엄마로부터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했던 자신처럼 키우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다. S에게 그 가치는 명문대 교수 같은 것과는 애초에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S는 성공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잘 살기 위해 선택한 행로에 유학이 포함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선택한 휴스턴에서 함께 잘 살 수 있는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와 잘 살며 당연한 결과로 보석같은 아이들을 얻었다. 자신이 소유한 에너지와 시간을 연구보다는 육아에 투자하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S는 전혀 갈등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충실했다.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꼭 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성공을 위해 더 큰 가치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와도 자신이 잃어버리는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세상이 인정해주고 박수쳐 주는 일이라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롭다고, 그게 성공이라고 여기며 서로 부추기는 세상이다. 그러나 S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판단이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분명한 친구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것에 있어 다른 사람의 평가 같은 것은 정말 1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던 나, 무언가 강하게 소신을 얘기하는 것이 겸손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던 나, 애초에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기보다 남들이 좋다는 길로만 열심히 걸어왔던 내게 S는 버거울 정도로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그때로부터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 내가 자신있게 내 의견을 얘기하고 소신껏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은 그간의 시간과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 S가 있다. 그런 당당함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고 단호하지 않으면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이 S이다.


좋은 친구는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멀리 있지만 한때 내게 눈부신 거울이었던 S. 자주 연락하지 못하지만 오늘 하루도 당당하게, 가치 있게, 만족스럽게 살아냈을 것이 분명한 S를 떠올릴 때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의미로 채워진 오늘 하루를 살아야겠다는 자연스러운 열의가 생긴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던 그 몇 년간 S가 내게 비춰주었던 당당함과 단단함의 그 빛이 오늘도 나를 비추고 있는 것을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잠언 속 한 구절이 참인 것이 분명하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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