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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읕 Jan 05. 2021

#2. 경계

2021년 1월 5일 화 

지금은 새벽 2시 49분


대체로 비몽사몽이다.


밤 11시 50분쯤에 지오가 크게 울었다. 겨울이 되고 실내가 건조해지니 아토피가 평소보다 좀 심하게 올라왔는데 두 세시간 단위로 크림을 듬뿍 발라줘도 가려워서 긁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잠결에 목덜미를 세게 긁었는지 목을 가리키면서 엉엉 운다. 우는 애 목덜미랑 팔다리에 크림을 치덕치덕 바르고 안고 어르기를 30여분. 겨우 재우고 나니 나랑 소영이는 그만 잠이 훌쩍 달아나버렸다.


계산해보니 벌써 깬지도 세시간이 넘었다. 가만 앉아서 생각해 보니까 헷갈리는 게 내가 어제 밤 9시에 잠들었다가 12시 전에 깬 건 밤잠을 끝내고 새벽을 맞은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늦은 낮잠을 잔 건지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밤잠을 마친 거라면 이대로 글을 마무리하고 책을 좀 읽다가 이른 아침을 먹고 재택근무 시작을 하면 되는 거고, 그게 아니라 늦은 낮잠이었다면 빨리 밤잠에 들어야 하는데 멍하니 노트북 앞에 앉아서 녹차나 홀짝이고 있다.


녹차 티백에 뜨거운 물을 리필하고 다시 자리에 앉으니 축 가라앉은 티백처럼 마음도 약간 축축하게 누그러진 느낌이다. 사실 좀 전까지는 대상 없는 분노에 계속 마음이 부글부글한 상태였다. 원래는 9시에 자서 새벽 3시 반에 깨고 글도 끼적끼적하고 책도 보고 아침까지 차려먹는 게 목표였는데 계획이 다 어그러졌으니 말이다.


아기는 자다가 불편하면 울고불고 깨는 게 당연한 이치고 와이프도 나만큼이나 피곤했을 테니 아기가 우는 소리에 5분대기조처럼 벌떡 일어나는 건 힘들었을 테고 그럼에도 난 이미 잠이 달아나버렸고 3시 반에 일어나려고 맞춰놓은 알람을 끄면서 이미 상황은 벌어졌는데 누군가를 탓해야 마음이 편할 테지만 그 누군가를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이 글을 쓰면서 이제서야 발견한다.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짜증을 어딘가에 풀었어야 했나 보다.


사실 글을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자주 던져보고, 글은 ‘나와 대화하고 나조차 몰랐던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일이니까’라는 조금은 속편하고 조금은 게으른 해답을 들고 지내오던 터였는데, 어쩌면 진짜 그게 해답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 십여분 남짓의 시간에 왜 화났는지 몰랐던 내 감정을 진단하고 화해하고 용서까지 했으니 말이다(물론 화를 낼 대상이 없었던 만큼 화해와 용서도 대상은 없다만). 글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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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낮에 읽은 책 얘기를 간단하게나마 정리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문득 경계라는 건 뭘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 살아가면서 수많은 경계에 놓여왔고 또 앞으로 놓이게 될텐데 지금도 소소하지만 경계의 상태인 듯 하다. 비몽사몽한 생태로 잠과 깸의 경계, 밤잠을 마쳤는지 아니면 낮잠만 잔건지 판단의 경계, 대상 없는 분노와 역시나 대상 없는 용서의 경계…


살면서 경계 위에 놓였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형식상의 논술 시험을 앞두고 두 개 대학 중 어느 대학에 갈지 골라야 했던 상황, 군생활 동안 이라크 파병을 지원할지 말지 갈등하던 순간, 카피라이터가 될지 기자가 될지 고민하던 순간, 이후로 입사와 이직 등등 수많은 경계선상의 상황들.


그 경계선 위에서 내린 결정들의 합이 지금의 나겠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쨌든 하나 분명한 건 내가 경계선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어떤 식으로든 변해왔다는 거다 - 그게 발전이 아닐지라도. 나에게 경계는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소속의 결핍), 앞이냐 뒤냐 옆이나 아니면 반대냐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방향의 결핍)였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치에 기대어 생각했을 때 경계에 있을 때 위태위태하고 괴롭고 힘들었지만 그때가 지나면 그만큼 스스로 삶에 책임감이 생기고 또 운이 따르면 보람까지 얻을 수 있었다는 거다. 앞으로도 삶이 정적이고 무료하지 않게 나를 경계선상에 올려 놓는 도전을 많이 해봐야겠다.


그리고 지금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잠을 더 자야겠다는 거다. 지금 놓인 경계에서 내가 내린 선택은 바로 잠이다. 끝.



(그나저나 일기니까 매일매일 가볍게 몇 자 적자고 시작한 일인데 또 너무 구구절절 이야기가 길어졌네. 지금도 이걸 매일 할 수 있냐 없냐의 경계선일 텐데 너무 힘 빼서 탈선하지 않게 내일부터는 좀더 가볍게 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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