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영감을 준 문장
심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9p (문학동네)
찰나.
산스크리트어로 “크사냐”
시간으로는 75분의 1초, 약 0.013초라고 해요.
찰나는 이토록 짧은 순간이지만 이 짧은 순간에 인생을, 인류를, 세상을, 우주를 바꿀 일이 벌어지지요. 시험에 합격이냐 불합격이냐를 가르는 것도, 금메달과 은메달이냐 결정짓는 것도, 전쟁도, 사랑도, 빅뱅도 역시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처럼요.
마침내 때가 오면 여름 한철 온 힘을 다해 울어대는 매미가 사실은 땅에서 7년 남짓을 인내한다는 것을, 지진이 일어나기까지 지층이 견뎌낸 압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물이 끓는 100도씨의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99도까지 참아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종종 까먹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찰나’가 오기까지 그 이면에 수많은 시간과 노력 또는 정성이 쌓였는지를, 그러니까 이를 테면 얼마만큼의 ‘존버’가 바탕에 깔려 있는지를 가끔 잊을 때가 있지요.
어떤 노력 또는 우연의 연속이 밀도 높게 쌓이고 쌓여 임계점을 넘으면, 그러니까 ‘존버’가 무르익으면 비로소 찰나는 찾아옵니다. 필연적으로 존버의 끝에서야 찰나를 만날 수 있는 거지요. 존버는 결국 찰나의 필요충분 조건일 겁니다.
아이디어도 마찬가지이지요.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고하는 ‘존버’의 시간이 있어야 반짝하고 빛나는 아이디어를 영접하는 ‘찰나’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이 ‘존버’의 시간을 굳건히 참아내고 견디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사실 우리는 뿌리부터 ‘존버’의 민족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하겠습니다. 단군신화에 잘 나와있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에게 곰과 호랑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찾아옵니다. 환웅은 100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을 것을 일러주지만 결국 호랑이는 중간에 도망가고 오직 곰만이 끝까지 버텨내지요. 결국 곰은 여자로 거듭나 환웅과 혼례를 올리고 단군왕검을 낳습니다. 네, 우리는 100일동안 마늘과 쑥만 먹고도 버텨낸 곰의 후손이지요.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유명한 덴마크의 소설가 카렌 블릭센은 매일매일 희망도 절망도 없이 조금씩 쓴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앙토냉 세르티양주는 열정이 인내보다 쉽다라고도 이야기했지요. 월드클래스의 작가와 철학자도 창작에는 그저 묵묵히 버티는 것이 정도라는 걸 강조합니다.
예전에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영화평론가인 이동진 작가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입대 전 아버지가 정말 힘들 때 펼쳐보라고 건네준 쪽지. 역시나 다를까 군생활 중에 위기가 찾아왔지요. 이동진 작가는 그때 아버지가 준 쪽지를 펼쳐보고 군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쪽지에는 다름 아니라 한자로 참을 인자 세 개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참을 인자가 세 개면 사람도 살린다고 했지요. 어디 사람 뿐이겠습니까. 참을 인자가 세 개면 죽어가던 아이디어도 살릴 수 있습니다다, 분명히.
아이디어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보면 어느 순간 결과물이 눈 앞에 나와있을 겁니다. 영광스러운 찰나의 순간을 위해,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그저 담대하고 담담하게 계속 아이디어를 짜내어 볼 일입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한탸의 직업은 폐지압축공입니다. 35년이나 똑 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 똑 같은 기계로 각종 책과 종이더미를 압축하지요. 그 와중에 일부 책을 폐기하지 않고 곁에 두고 읽으면서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되고요. 독백으로 펼쳐지는 한탸의 깊은 사유와 고뇌는 책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유로 결국 한탸는 압축기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는데,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35년 동안 (의도치 않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책을 접하며 결국에는 어느 현자 못지 않은 깨달음을 얻게 된 한탸의 위대한 ‘존버’에 저는 눈길이 갔어요.
그래서 저는 한탸의 일생을 떠올리며 오늘도 책상 앞에서 존버합니다. 아이디어와 씨름하면서, 한 줄도 잘 써지지 않는 글과 씨름하면서.
영감 충전 지수(오점만점) : ★★★★★
자꾸만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 있고
읽을수록 책장이 줄어드는 아까운 책이 있고
읽다 보면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은 전부 다 입니다.
주인공의 사유를 엿보고 인식을 넓힐 수 있고
좋은 표현도 많이 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