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읕 Oct 23. 2021

빌드업에 대하여

오르한 파묵, 움베르토 에코, 무라카미 하루키 외 <작가란 무엇인가>

#영감을 준 문장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면 하나하나 연결해봅니다. 그게 이야기 줄거리가 되지요. 그러고 나서 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설명해줍니다. (중략) 쉬운 언어와 훌륭한 은유, 좋은 알레고리를 사용해야 하지요. 그게 제가 하는 겁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114p (다른)




뉴욕에서 출판되는 <파리리뷰>라는 문학잡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 잡지는 노벨문학상, 퓰리처상, 부커상 등 유명한 문학상을 수상한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인터뷰 하는 걸로 유명한데요. 여기에서 인터뷰한 내용의 일부를 추려서 책으로 엮은 게 바로 <작가란 무엇인가>입니다.


유명작가들이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요. 무라카미는 이야기를 보통 어떻게 풀어가느냐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면 하나하나 연결해봅니다. 

그게 이야기 줄거리가 되지요.

그러고 나서 이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설명해줍니다.

(중략)

쉬운 언어와 훌륭한 은유, 좋은 알레고리를 사용해야 하지요.


얼핏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대답 속에 그의 작품이 그토록 잘 팔리는 비밀이 숨어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비슷한 주제의식, 동일한 소재를 두고도 이야기를 어떻게 빌드업 할 것인가, 차이는 여기에서 발생하지요. 빌드업의 수준에 따라 그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영화 <저수지의 개들>로 이름을 알린 쿠엔틴 타란티노는 1994년에 개봉한 <펄프픽션>으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되었어요. <펄프픽션>은 사실 스토리만 놓고 보면 그렇게 특별할 게 없어요. 그런데 이야기 순서를 앞뒤로 뒤섞는 세상에 없던 연출로 사람들에게 충격과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지요. <펄프픽션> 이전까지 영화의 서사는 당연히 시간 순서에 따른 이른바 ‘음악적 문법’이 당연시 되었는데, 쿠엔틴 타란티노는 천재적인 발상으로 사건의 시간을 마구 섞어버린 ‘회화적 문법’을 선보였어요. 그는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빌드업한 거지요. 


20세기말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행한 게임을 뽑으라면 당연히 스타크래프트가 뽑히겠지요. 그리고 스타크래프트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임요한입니다. 스타크래프트에는 인간 종족 테란과 외계 종족 프로토스, 저그 이렇게 세 가지 종족이 등장해요. 게임 출시 초기만 해도 별다른 특성이 없던 인간 종족 테란으로 플레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임요한의 등장 이전까지는 말이지요. 임요한은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전략과 빌드업을 창조해 가장 약하다고 평가 받던 종족인 테란을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 탈바꿈시켜 버립니다. 게임 개발사인 블리자드에서조차 임요한의 전략과 빌드업에 혀를 내둘렀고, 본인들이 만든 게임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도 하지요. 


빌드업의 중요성은 분야의 경계를 두지 않습니다. 스포츠에서도 매우 중요하지요. 누구나 한번쯤 이름은 들어봤을 FC 바르셀로나. FC 바르셀로나가 세계 최고의 인기 축구구단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축구를 하기 때문이지요. 축구는 단순히 골을 잘 넣고 잘 막으면 이기는 스포츠입니다만, 바르셀로나의 철학은 그걸 뛰어 넘어요. 최후방 골키퍼부터 최전방 스트라이커까지 유기적인 패스와 잘 짜인 빌드업 플레이로 축구가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골을 넣는 것, 그것이 축구팬들을 열광시키지요. 


예전에 다녔던 여러 광고회사에서 저 역시도 빌드업의 중요성을 자주 느꼈어요. 한 번은 모 브랜드의 생활가전제품 경쟁 PT가 있었어요. 회사의 대표 아이디어를 뽑기 위해서 사내에서 여러 팀이 경쟁을 붙었는데 어떻게 해야 이 경쟁을 뚫고 제 아이디어를 팔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지요. 그러다가 그 당시에 읽고 있던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들려주지 않은 23가지 이야기>에 나온 아래 구절을 인용해 제 아이디어를 빌드업하기 시작했어요.


“세탁기의 발명이 인터넷의 발명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이유인즉슨 세탁기는 여성에게 시간을, 그러니까 자유를 돌려주었고 자유로워진 여성은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마침내 이 생활가전 회사가 마침내 개발한 것은 “가전이 아니다, 자유다”라고 이야기를 빌드업했어요. 결국 제 아이디어가 채택되었습니다. 다른 팀에서도 궤가 비슷한 아이디어가 여럿 나왔습니다만, 빌드업을 통해서 제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지요. 


언젠가 인터넷에서 면접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면접에서 붙은 팁을 알려주겠다는 거였는데요. 이 사람은 면접 전 자기소개서에 존경하는 인물을 이소룡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뜬금없지요. 수많은 사람 중에 이소룡이라니, 약간은 당황스럽고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대답에 면접관들은 좀 당황을 했나 봐요. 그런 면접관들에게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소룡을 존경합니다, 천 가지 발차기를 한 사람은 무섭지 않지만 한가지 발차기를 천 번한 사람은 무섭다는 이소룡의 철학을 존경합니다, 라고요. 


어떤가요. 기발하지 않나요. 아이디어를, 이야기를 제대로 빌드업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비슷한 요리 재료가 눈앞에 있더라도 빌드업을 통해서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빌드업의 힘이고 아이디어의 차별성은 여기서 탄생하는 거겠지요.



영감 충전 지수(오점만점) : ★★★★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세계와 철학을
살짝이나마 맛볼 수 있는 기회. 재미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찰나와 존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