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하루키, 독서 그리고 커피

by 지피지 jipiji

오솔길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는다. 지금은 딱 11시 11분. 사실 뭔가를 이리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오후 5시에 또 다른 미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오늘 오전은 근래의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대대적으로 매트리스 이불까지 정리를 하고, 평소와는 달리 물 한 잔 먼저 마시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적당히 젖은 머리로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를 다른 방 책상에 옮겨둔 탓에 다소 어두운 책상 위였지만 옆의 커튼을 걷으니 딱 알맞은 조도가 되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책상보다는 다른 책상에서 더 집중이 잘 됐던 것 같은데, 역시 나는 이따금씩 내게 맞게끔 변주를 줘야 하는 사람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듯이 나는 의식적으로 내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순간들을 통해 여유를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어쩌면 이미 준비가 됐다고 믿는 탓일 수도 있고,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 여기는 탓일 수도 있다. 마음이 내내 불편하다가 어젯밤 8-9시쯤인가, 별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이 올라왔다'. 역시 모든 건 기분 관리야,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러 요소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가장 트리거가 됐다고 생각되는 건 전부터 좋아했지만 한동안 별 감흥 없이 보던 어느 한 유튜버의 일상이었다.



좋아하는 광화문과 서촌, 유난히 90년대스러운 활자가 들어간 편집, 이전의 내가 좋아하던 내 삶의 모습과 맞닿아있던, 누군가의 혼자 보내는 어느 겨울날 일상을 보다 보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래, 저런 삶이 내게도 있었어. 나는 저런 것들을 좋아했지. 이런 생각도 들면서 적어도 지난 한 달은 정말 전에 없는 생각과 모습으로 (열심히) 살았다면, 이번을 기점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하루'로 속히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해 보면 지난 한 달의 내 모습이 어쩌면 진짜 내가 편안함을 느끼고 명확히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일 수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대학교 입학 전의 내 모습과 근래 들어 가장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간 내가 이리도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삶을 산 것 같은데, 이따금씩 나의 '원래' 모습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는데 지난 한 달 동안 그 모습과 함께 지낸 것이다.



물론 이 모습도, 저 모습도 모두 나다. 사람은 다 입체적이니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간극이 꽤나 극명하고 각자의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역시 명확히 다른, 역시나 '중간이 없는' 내게는 그 입체성이 유독 크게 느껴진다. 상황에 따라 더 편한 상태의 내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인지만 있다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허나 어떤 모습의 나일지라도 한 가지는 언제나 함께 간다. 바로 내 일상을 소중히 하고, 나의 생각과 마음의 소리에 경청하고,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꾸준함을 지향해 왔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던 내가, 어느새 '나 참 꾸준하게 뭔가를 잘하는 사람이구나'라며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성취라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할 때가 있고 나약할 때가 있고 많은 것에 휘둘릴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다시 일으켜 세울 줄 알고, 내가 어떨 때 잘 굴러가는지 알고, 그런 상황과 환경을 조성해 줄 줄 알면서 어떻게든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 역시도 나이기 때문. 나의 모든 모습을 내가 인정하고 내가 이해해 주고 내가 사랑해 준다면 그 인생은 정말 '똑같이 다시 살아도 좋을' 인생이지 않을까?



글을 다 쓰고 보니 11시 31분이 되었다. 20분을 글쓰기에 투자한 것이다. 제법 마음에 드는 오전의 성취다. 이제는 우선순위에 따라 오늘의 내게 주어진 미션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그냥 나답게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또 얻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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