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삥을 뜯는 인간들이 있냐?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이자까야 나무’ 3층에 들어갔다. 거긴 다 룸이다. 나무 원목 창살과 투명 유리로 나눠져 있어서 시야는 확보되면서 소음은 차단되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후배가 데리고 온 여자를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쳐다보았다.
‘ 분명히 내가 봤는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
병현이는 물류창고에서 하루종일 짐을 날랐다면서 500cc 맥주잔을 들어서 그대로 원샷을 했다.
그는 잘하던 운영하는 회사가 바쁘면 가끔 부족한 일손을 돕고는 한다.
“오늘 제가 흘린 땀이 이거보다 많을걸요. 하하하.”
분명히 병현이와 단 둘이서 한잔 한다고 해서 나갔는데 녀석은 말도 없이 내가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애인이다. 같이 알리바이도 확보하고 술도 한잔하고 뭐 그런 작정으로 데리고 온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살짝 불쾌감이 올라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아주 키가 가냘프고 몸집이 작다. 나의 시선을 피해서 병현이를 주로 쳐다보는 목선은 관능적으로 보였는데 왜 그런지 이유는 몰랐다.
후배 병현이는 맥주를 벌써 1천 cc나 들이켠 탓에 화장실에 또 갔다.
대학교를 다닐 때도 말술이었는데 그 버릇은 여전했다.
여자와 단 둘이 있으려니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게 되었다.
깊은 속눈썹과 날렵한 코, 머리스타일과 화장만 지우면....
어디서 봤더라. 정말 익숙한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생각날 듯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더구나 여자는 이미 나의 존재를 인식했는지 아까부터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그..... 형님의 와이프?
아, 형수였다. 인수 형님의 아내가 왜 여기에. 중국인이라고 했었는 데.
인수 형님은 나이 40살에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여자를 만났다고 너무 좋아했다는데.
내가 알기론 인수 형님은 이 어린 여자 때문에 잘 살고 있던 가정을 깼다.
그때가 5년 전이니 지금 저 여자의 나이는 겨우 35살일 것이다.
그래 맞아.
그래서 난 호기심 반, 부러움 반으로 그 결혼식에 참석했었고 먼 발취에서 본 적이 있었다.
형수는 워낙 이국적으로 생겨서 기억에 팍 남아 있었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을 정확히 닮았었는데
그녀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이제 나이가 35살 밖에 안된 그녀는 어떤 일로 병현이 같은 호색한과 나타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도저히 그냥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흡연실로 갔다. 병현이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형도 아직 담배 안 끊었네.”
“누구야? 얘인?”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어 그렇지 뭐.”
“얼마나 됐는데?”
“10년은 됐을 걸, 중국에서 만났었어. 그때는 대학생이었지 한국어 배운다고 학원에 다니는 얘를 꼬셨지..” 병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그때부터 만난 거야?” 내가 물었다.
“그럼 하지 내가 뭐 절간의 주지스님도 아니고 절개를 지킬 일이 뭐 있수. 하하하. 형도 참 나이 들었네. 그런 걸 다 묻고.. 아 참 형, 나 다른 얘가 연락이 왔네, 걔는 독신인 데, 어장 관리하려면 난 거기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아. 오늘은 거기서 자야지. 여긴 형이 좀 데려다주라 형 집이 분당이지? 형 맘에 들면 가져도 되고, 난 한 5년 넘고 나면 지겹더라. 한 2년에서 3년이 딱 좋은 데. ”
녀석은 특유의 껄렁거림으로 내 얼굴 바로 옆으로 담배연기를 뿜었다.
“어, 그렇지. 분당.”이라고 말했지만 병현이는 벌써 흡연실을 나서고 있었다.
“형, 저 여자얘 집이 성복역이야.”라고 그를 따라가는 복도에서 그는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래 그건 나도 잘 알아. 너보다. 인수 형 집에 따라 들어가 본 적도 있었다. 5년 전에도 형수는 늘 고개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취한 형님을 부축하느라 한 두어 번 들렸었다. 그건 우리 집에서 전철로 네 정거장인가 더 가면 있는 곳이었다.
당시 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탓에 자신의 남편 후배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긴 나도 그녀의 이국적인 미모가 아니었으면 알아보지 못했을 터였다.
우리는 자리로 돌아와서 몇 가지 쓸데없는 얘기들을 더 했고 내 관심은 온통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뻤다. 하긴 이제 겨우 35살이니.
피부는 탄력이 넘쳤고, 여자로서는 활짝 필 나이였다.
검정 반팔 티셔츠에 회색 반짝이가 달린 발목까지 오는 주름치마 같은 것을 입었을 뿐인데 몸에 딱 붙은 티셔츠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강조했고, 어깨를 덮은 흑단 머리칼 사이의 긴 목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잡아당겼다. 웃을 때마다 마치 라이네이트라도 한 듯이 여자의 치아는 찬란한 빛을 반사했다.
저녁은 당연히 내가 샀다.
자리에 돌아와서 후배 옆에 앉아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정확히 그녀였다.
“아, 맞다. 형. 잠시만요.” 병현이가 나를 룸 밖으로 불렀다.
복도에서 내 귀에 병현이가 속삭이듯이 얘기를 하는데 내 시선은 그녀를 향했다.
그녀가 신기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보였다.
“저, 갑자기 다른 약속이 생겨서 거기로 가야겠어요. 아 재는 정리를 해야 하는데 자꾸 찐따 붙어서. 아 참 형 집이 어디라고 했죠?”
조금 전 얘기를 했는데도 굳이 여자 앞에서 다시 확인하는 후배다.
“나? 난 분당. 정자역.”
“아, 그럼 저 친구 집이 성복역이니까. 전철 같이 타고 가면 되겠네요. 형이 잘 좀 바래다줘요.
나 먼저 좀 일어날게요.”
“너 혹시 또 다른 얘인 만나러 가니?” 내가 부러움인지 모를 멘트를 날릴 줄은 나도 몰랐다.
“25살에 만나서 10년이 지났네 벌써. 시간 참 빨라. 재 남편이 잘 안 해주나 봐요. 형이 좀 어떻게 해 봐줘도 되고. 난 솔직히 재랑 헤어지려고 재가 안 떨어져요. 물론 이해는 가지. 내가 쟤한테는 연하남이니까. 암튼 난 가요. 형. 참 형이 이 참에 가질래요?” 병현이의 입이 장난기로 벌어졌다.
병현이는 여자에게 가더니 중국어로 뭐라고 얘기를 했다. 아, 중국여자라고 했지.
여자가 병현의 어깨 쪽을 두드리면서 시선이 살짝 날 향하더니 수줍어하면서 웃었다.
그렇게 병현이는 손을 들고는 나가버렸다.
짜식은 늘 그런 식이었다. 여자 꼬시는 능력 하나는 내가 인정했다. 아마 그 능력을 가지고 사업에 활용했으면 재벌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쉽게 꼬셨고 그래서 주변에는 항상 여자들이 넘쳐났다. 난 그가 가끔 남긴 뼈다귀를 굶주린 똥개처럼 물고 빨고 했다. 그는 한우가 아니면 취급도 안 했고 난 내게 던져진 뼈다귀에 남은 고기가 넉넉하기만을 바랬다.
5년 전에 이혼하고 청담동 아파트를 아내에게 기꺼이 주었다. 그건 거의 내 전 재산이었지만 아내와 같이 모은 재산이기도 했다. 대출이 7억인가 있었지만 33평 아파트 시세는 천정부지여서 아내는 기꺼이 도장을 찍어 주었다. 아마도 아껴서 살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였다. 아내도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였다.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에요.” 여자의 말이 내가 막 손으로 든 잔에 부딪혔다.
“네?” 내 시선이 여자의 눈을 향했다. 눈이 깊었지만 공허해 보였다.
“지금 나오는 노래요. 등리쥔의 노래죠. 달빛이 내 마음을 보여주네란 뜻이에요.”
여자의 입술이 오물거렸다. 붉은 고기가 먹고 싶었다.
“저를 지겨워해요.” 두 번째 잔을 들었을 때 여자가 대뜸 말했다.
“어라, 알고 계셨어요?”
병현이가 있을 때는 술에 손도 대지 않는 여자는 자신 앞에 빈 잔을 들어서 내밀었다.
“죄송해요. 저 눈치가 빤하거든요. 저를 선배한테 맡기고 간 것이죠?”
“눈치 빠르시네요, 네 알고 계셨어요?”
나는 갈등했다. 내가 친한 형님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참 곤란한 상황이었다. 인수형님의 형수이자 병현후배의 얘인이라.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와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는 술자리에 그것도 룸에 둘이 앉아 있었다.
참 나 원.
원 참 나.
나 원 참.
이 세 개는 어떻게 말해도 말이 된다. 기가 막히는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기가 막히게 유연하다.
여자는 술을 잘 마셨다. 둘이서 소주가 착착 들어갔다.
아까는 한 잔도 안 마시더니.
이따금씩 여자가 혀를 치아로 물었다.
나는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
아주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나는 이미 5년간 수도승 같은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난 의학 지식이 가미된 웹 소설을 쓰겠다고 온갖 지랄을 떨고 있었다. 소설 창작 강연을 쫓아다녔다. 정신과 의사인 아내만큼 힘든 상대는 드물다.
일단 대화에서 여자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이 남자인데 정신과 의사는 더 힘들다. 힘든 이혼 과정을 거치면서 이젠 여자 쪽은 쳐다도 보지 않겠노라고 결심 또 결심을 했었다. 난 의사임에도 정신적으로 피폐했고, 현실로의 도피로 소설을 선택했다. 그나마 아이가 없었던 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런 소설 같은 상황이 있나.
아니 현실에서는 소설보다 더한 일이 벌어진다. 그런 현실을 소설로 옮겨 놓으면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선배의 아내이자 후배의 얘인인 여자와 단 둘의 상황이니 참 이런 딜레마가 없었다.
심지어 여자는 병현이가 자신과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다.
인수형님은 지금 미국 맨해튼에서 일주일간 개최되는 정신과 학회에 참석 중일 것이었다.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었다.
내 정신도 못 챙기는 주제에 무슨...
“그쪽도 의사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글도 쓰시는 거예요? 와 멋지다.”
하여튼 병현이는 입이 촉새였다. 그놈에게 말하면 NHK보다 정확히 보도가 된다. 가끔 난 그걸 역이용하기도 했다.
“그렇죠 뭐.” 난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려고 노력했다. 아니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 속물근성을 떨치려고 얘썼다.
내가 거부하기에 그녀는 너무 섹시했다.
고노와다에 명란계란말이, 삼겹살 숙주볶음을 안주삼아 새로 시킨 소주 3병이 금세 동났다.
계단이 위험하니 여자를 부축했다.
조용히 인근 호텔로 갔지만, 내 손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렇게 형수와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나눴다.
형수는 눈꺼풀이 떨린다면서 맥주라도 마시고 가자고 했다. 형수의 집 앞 맥주집에 앉았다.
“또 할 말이 남았어?” 가슴골을 향한 내 시선을 느끼고는 그녀는 잘못 낀 단추를 고쳐 끼웠다.
“오늘 저는 형수한테 삥 한번 뜯었어요. 또 계속하면 그땐 인수형님한테 이를 겁니다.”
“끝이야?”
“네.”
형수가 내 핸드폰 번호를 물었지만 난 절대 말하지 않았다.
끝.
[에필로그]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이런 방법이 저들의 관계를 끊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극단의 방법을 썼다.
내가 평생 한 번도 해 보지도 않은 필름 같은 것을 혀 밑에 대고 쓴 것은 정신심리학에서 말한 ‘포만법’을 쓴 것임을 밝히고 싶다. 어떤 사람이 뭔가에 굶주려 있으면 한 번에 그걸 배 터지도록 주어서 고치는 일종의 심리치료법이다.
마음속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같은 상황에 만약 당신이 나처럼 처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은가.
형님에게 말한다고? 그럼 그 가정은 깨질 것이다. 그리고 병현에게 그만 만나라고 말한다면 순순히 그가 말을 들을 것인가? 그건 당신의 착각이다. 세상은 그렇게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그럼 그냥 친한 선배의 형수에게 형님께 이른다고 협박을 한다고? 하하하 순진한 소리 마라. 겨우 그런 말로 후배와 형수의 관계가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쩌면 더 어두운 곳으로 숨을 것이다.
그럼 결국 그 파국은 언젠가 형님을 덮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보고 난 후에 모른 척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 그냥 모른 척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형수는 저 후배와 지금도 만나고 있을 것이다. 불행한 선배는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나중에 아이라도 태어나면 누구의 아이인지 모를 괴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래, 나도 형수와 술을 마시면서 이런 생각들을 다 했다는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물론 변명 같지만 난 지난 5년간 여자는 근처에도 못 가봤다. 그리고 내 남성성이 술 마시는 내내 뻗쳤던 불경한 상상으로 가득 찬 것도 인정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국 내 형수를 통해서 내 검은 회포를 푼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래 그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형수는 너무 예뻤고, 너무 섹시했다.
그럼에도 내가 형수랑 잠을 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는 것이다. 당신이 정신과 의사이고 나와 같은 상황을 발견한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일지 말이다.
내 응급 처방(?) 덕분에 그녀는 결국 병현과 관계를 끝냈다. 그건 정기적으로 형수가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굶주려 있다면서 ‘포만법’을 원하고 있다.
물론 의사로서 나는 그녀의 포만법을 해결할 다른 문제를 찾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 정신과 의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