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by 기록

소년이 좋아하는 놀이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소녀와 산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숨이 차면 산너머 아파트에 오가는 차들. 아이를 태우고 내리는 아줌마들. 등산복을 입고 뒷산을 오르는 화려한 옷들의 색 맞추기를 하며 뛰어다녔었는데 이제는 머리를 쓰는 놀이에 훨씬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소년은 커다란 돋보기 하나를 주웠다. 그리고 그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았다.

- 이것 좀 봐!

소년은 돋보기를 머리 위로 들었다. 커다랗게 확대된 눈송이가 빛을 받아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보석처럼 반짝였지만 마치 그것은 활짝 핀 꽃 아니 별을 볼 수 있다면 별이 그렇게 생겼을 것이다. 반짝이는 별 같은 그 모습에 감탄이 저저롤 나와싿.

- 정말 대단하지 않아? 진짜 꽃보다 훨씬 예뻐. 왜냐고? 완벽하기 때문이지. 이 투명하고 빛나는 모습을 봐! 녹지만 않는다면 참 좋을텐데...

소년은 이내 녹은 눈이 아쉬운지 돋보기를 소매로 닦은 후에 다시 떨어지는 눈을 밭아 한참을 보고 다시 닦고 눈을 받아 보기를 반복했다.

소년은 집으로 들어가더니 두툼한 장갑을 끼고 설매를 등에 멘 채 나타났다.

-난 놀이터에 가서 다른 남자애들하고 놀래. 허락도 받았어.

소년은 소녀에게 고함치듯 말하고 소녀를 그 자리에 새워둔 채 쏜살같이 달렸다. 놀이터에 도착하자 썰매 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설매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색이 화려했지만 모습은 모두다 같았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서인지 썰매 바닥은 뭉툭하기 그지 없었다.

쓩~! 쓰스스슥 쓰스스슥

소년은 놀이터 끝에서 끝까지 쭈욱 미끌어졌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썰매와 비교도 되지 않게 바닥이 날카로운 소년의 썰매는 그 놀이터도 작다는 뜻이 끝까지 가서 놀이터 끝 낮은 경계 담에 부딪혔다.

-우와

서로서로 썰매 끈을 잡고 끌어주다가 갑자기 쭈욱 미끌어지는 소년의 썰매는 또래 아이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어린아이들 사이에는 모두 같거나 아니면 모두 같은 것을 뒤집어 버릴 만큼 뛰어난 무언가 그 무언가만 있으면 모두를 휘어 잡을 수 있었다. 소년은 아이들의 대장이 되어 한창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소년의 썰매는 아이들의 썰매보다 빨랐고 눈 위에서 미끄러지는 속도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즐거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도 흘렀다. 모이면 그 안에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변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년이 가져온 썰매는 아파트 아이들처럼 완제품으로 된 썰매가 아니기에 조금씩 이음새가 헐거워지고 미끄러지다가도 조금씩 틀어진 부분 때문에 느려졌다. 초조함을 느낀 소년의 눈에 커다란 자동차가 보였다. 차 뒤편에 서 있는 여인은 두꺼운 하얀색 털옷을 입고 있었고 트렁크에 무엇인가를 넣었다. 여인이 트렁크에 짐을 넣고 운전석으로 가는 순간 소년은 자기 썰매의 끈을 자동으로 내려오는 트렁크에다 던져 넣고 자세를 잡았다.

차 밖으로 크게 틀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곳이어 차는 출발했다.

-우와

아파트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소년에게로 쏠렸다.

- 끝내준다

소년은 고함을 치면서 자신의 썰매를 꽉 잡았다. 함께 놀던 아이들의 부러움이 담긴 함성과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마음은 다른 감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틀어져서 속도가 나지 않도록 방해했던 썰매 날은 차가 속력을 조금씩 올리자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썰매는 그 눈 위를 미끄러졌다. 차는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서 조금씩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소년은 썰매의 끈을 꼭 잡고

-멈춰요 멈춰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몸이 소리칠 힘 조차 끈을 잡는데 쓰도록 선택한 듯했다. 하얀 차동차가 도로에 들어서자 주변의 차들이 그 위험한 상황을 알고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소년을 끌고 가는 하얀 차가 멈추지 않자 옆 차선의 차가 하얀 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면서 옆으로 붙었다. 운전을 하던 여인은 이유도 모르게 사고가 나지 않으려고 속도를 줄이면서 차를 우측으로 붙였다.

썰매는 좌우로 흔들리고 경계석으로 밀린 눈더미들에 부딪히면서 속도를 조금 줄였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못했다. 소년은 차의 뒷부분에 머리를 부딪혔고 줄을 꽉 잡았던 손은 장갑을 끼고 있었음에도 몰아치는 냉기에 굳어버린 듯했다.

- 야이 정신 나간 사람아. 운전하면서 주변도 안 보냐

하얀 차를 옆으로 붙이게 한 차에서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여인은 상황을 모르기에 차에서 내려 상대차를 발로 찍었다. 상대 차 운전자는 양 손을 옆으로 들며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이 한 마디 하려는 순간 뜨문뜨문 지나가는 차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응..

그리고 자신의 차 뒤에서 한 소년이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여인은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더니 차신이 발로 찍은 차량에 명함 한 장을 던졌다. 명함에는 '스노우 크리스탈, 이사 스노우 퀸'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소년을 조수석에 태웠다. 조수석에는 새하얀 털코트가 있었지만 여인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여인의 자동차나 차 내부에 있는 선글라스나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생각하면 여인에게 그 비싸 보이는 코트도 별것 아닌 듯했다. 소년은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떴다. 눈앞에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눈으로 만들어진 듯한 하얀 피부를 지녔다. 피부에서 광채가 난다는 화장품 광고가 거짓말이라 생각했는데 반반 짝 거리며 희미한 빛을 내뿜는 여인은 마치 빛이 반사되는 눈 같기도 했고 밤하늘 어스름한 달무리 같은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그녀는 소년의 이마에 키스했다.

- 많이 아프지? 어지럽지는 않니?

여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맞춤은 한여름 뜀박질을 끝내고 냉장고에서 냉수를 급하게 마셨을 때처럼 차가우면서 순간 숨이 멎을 만큼 날카로웠다. 그것은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그리고 소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아래로 숙이로 손만 만지작거렸다. 이런 장난을 쳤으니 엄청난 야단을 맞을 것이고 아까 차에 부딪혔으니 그것에 대한 변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만 만지작 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여인을 쳐다봤다. 여인은 두 번째 키스를 해주었다.

- 병원에 가자

아무 말 없이 혼내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말과 함께 다시 여인의 키스를 받자 소년은 지금 상황에 대하여 다 잊었다. 그는 오직 아름다운 이 여인과 있기만을 원했다.

-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우측으로 붙을 때 쌓아둔 눈더미를 이용해 속도도 줄이고 충격도 줄였어요.

- 그러니?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지금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있거든. 그러면 일단 함께 가자.

차는 점점 더 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소년은 왜인지 점점 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차 안이 이상하게 밖보다 더 추운 느낌이었고 계속해서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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